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28절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 인줄 알고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 대답하시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가르치시고, 이런 일을 말하며 또 표적을 보이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시기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항상 함께 하심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일이 조금 생각대로 또는 계획대로 잘되어지면 자신이 한 것 같이, 자신이 기도해서, 자신의 믿음때문에 일이 잘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게된다. 또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며 자신의 하나님 앞에 무언가 열심이 또는 정성이 부족해서 일이 잘 않되는 것 처럼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노력이 있기때문이라하시지 않고,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고 절대로 혼자 두시지 않으셨기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같이 하셔서 감당할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때문에 순간,순간의 위기를 말씀(8장1절-11절 음행중에 잡혀온 여인의 경우)으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실때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삶에 순간 순간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는지? 나는 예수님처럼 나의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뤄나갈 수 있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갈때, 주님이 나를 혼자 두시지 않고 항상 같이 하셔서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 내 힘이 아니요, 내 노려과 정성이 아닌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때문에 감당할 수 있음을 고백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가? 예수님은 29절에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다. 항상, 언제든지, 모든 일에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결단코 단 1초라도 혼자두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매사에, 모든 일에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내 뜻, 내 기쁨, 내일을 위해서 일하고 노력하면서 주님께 도와달라면서 혼자 있음에 슬퍼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의 목적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의 전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그 함께하심이 그 일을 감당케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이 함께하심의 은혜속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기쁨이 아닌 나의 삶의 뜻과 목적이 아닌 주님의 뜻과 목적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저 또한 주님따라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내 기쁨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께 함께해달라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지 말게하시고 제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모든 일에, 매사에, 순간에 할 수 있게하시어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의 능력을 체험케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따라 살려는 모든 중앙 청년들에게.....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2010년 11월 4일 목요일
눅 24:5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절,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올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녀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 옮겨지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고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요 전능자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경속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자꾸 찾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이미 무덤에서 살아나 나오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했고 죽은 예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큰 은혜가 넘치지를 않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까?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까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에서 만 예수님을 찾고 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초라한 삶과 생활의 현실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힘이들고 지치고 능력이 없고 피곤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5절에 하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어찌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 나와 시간시간, 아닌 매 초마다 함께 해주시는 그분을 죽은 신 것같이 무덤에서 성경안데 갇히신 것처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을 깨닫게 하시기위해 하신 말씀이 또한 6절과 8절에 살아계셨을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살미 힘들고 지칠때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이 느껴지고 이 험학한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이 생각될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입니다. 성경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고 나를 한번도 혼자두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었던 때를 기억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었던 때를 기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의 감격을, 은혜를 되살려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다면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는 나 혼자 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것 같이 주님은 성경속에나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혼자 눈물로 내 삶을 한탄하며 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항상 제 곁에 계셨고 제 삶속에 살아서 저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을 되살리고 받았던 은혜를 기억해 볼때 분명히 그때 살아계셨고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도, 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녀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 옮겨지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고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요 전능자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경속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자꾸 찾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이미 무덤에서 살아나 나오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했고 죽은 예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큰 은혜가 넘치지를 않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까?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까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에서 만 예수님을 찾고 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초라한 삶과 생활의 현실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힘이들고 지치고 능력이 없고 피곤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5절에 하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어찌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 나와 시간시간, 아닌 매 초마다 함께 해주시는 그분을 죽은 신 것같이 무덤에서 성경안데 갇히신 것처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을 깨닫게 하시기위해 하신 말씀이 또한 6절과 8절에 살아계셨을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살미 힘들고 지칠때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이 느껴지고 이 험학한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이 생각될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입니다. 성경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고 나를 한번도 혼자두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었던 때를 기억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었던 때를 기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의 감격을, 은혜를 되살려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다면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는 나 혼자 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것 같이 주님은 성경속에나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혼자 눈물로 내 삶을 한탄하며 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항상 제 곁에 계셨고 제 삶속에 살아서 저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을 되살리고 받았던 은혜를 기억해 볼때 분명히 그때 살아계셨고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도, 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2010년 10월 31일 일요일
눅 10장 38절-42절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앞으로 12월 첫주까지 성경공부가 없고 부서모임을 갖는다 하네요.
Qué pena, alguién se alegra? 난 조금 걱정이 되는데...
누가복음 10장39절-42절
39절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41절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청소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정리도 하고, Mesa를 치우고
너무 준비할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정신없이 바쁨) 하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안자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듣고 있었다.
마르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지만 너무 많은 일로 바빠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놓치고 있는 그녀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가장 소중한 한 가지, 매일 오시지 않는 예수님이 어렵고 찾아
오신 그날에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일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일 한가지를 택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빼앗기지 안는다 하셨다.
교회도 어수선하고 2010년도를 마치고 2011년도 맞이하는 이 어지러운 이 시기에 과연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것인가? 현재 청년부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을때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한가지
현재 이 싯점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택하여 하라고 하시면 예수님을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닐까?
그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다면 마르다가 아무리
예수님께 40절 마리아에게 도와주라 얘기해달라며 불평하더라도 마리아가 결코 빼앗기지
않기위해 예수님의 발아래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듣고 나누고 은혜받는 이
일 한가지, 가장 중요한 이 일을 붙들고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되지 않은지?
청년부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청년부가 말씀을 사모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예수님 닮아가는
이 삶에서 말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리아처럼 행동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조원들이라도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붙들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아들과 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따라 블로그(prosenor.blogspot.com)에 은혜 받은 말씀들을 올리니 같이 은혜받고 또
여러분들이 은혜받은 말씀들도 올려주기를 바래요.
11월 한달 이렇게라도 말씀을 나누고 같이 은혜받기를 원해요.
12월이 되면 간사들이 직접 여러분과 성경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나, 모양이라도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 나누는 여러분의 축복된 삶을
위하여 기도하며,
이재훈간사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눅22:51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복음 22장에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시기 위해 마지막 제자들과의 유월절을 보내시고, 감람산에 습관대로 가셔서 땀 방울이 피 방울이되도록 기도하시고 난뒤 유다의 배반으로 결국 잡히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한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를 피해가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복종하고 이에 순순히 따르기로 하셨다.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인간적인 마음의 뜻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의 원함을 참고 내려놓겠다고 결정하셨다.
52절에, 감란산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자신이 무슨 강도인 것처럼 강도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것 까지도 참으신 것이다.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악한 죄인으로써 전락하는 이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이 때에 예수님을 강도 취급하며 잡아가려는 이 방법까지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이일까지도 참고 받아드리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강도를 잡듯이 다가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트리자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하려하는데 그들의 방법이 너무 인간적이고 내 자신이 오히려 나쁜사람인 것 같이 대하고 사람들에게 떠들어데는 이 비열한 방법까지도 참고 받아드려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이것까지, 가장 견디기 힘든, 진실이 가려지고 나를 강도로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 악랄한 방법까지도 참아야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까지도 참으셨기에 63절이후 부터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욕하고, 채찍질하고, 침을 뱉어도 참을 수 있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기에 그의 뜻을 이뤄가는 방법에도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방법에는 불만이 많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고집하는 말만 주님의 뜻을 외치며 그분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뜻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면 그 분의 뜻을 이뤄가시는 방법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이 먼저 실천해 보이신대로 우리도 따라 해야된느 것이다.
주님!,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방법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그래서 이것까지 참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힘주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2010년 10월 18일 월요일
눅19장1절-10절 삭개오가 보기를 원함
삭개오의 정체성, 그는 누구인가로 소개한다. 2절에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 열등의식 불만까지도 가지고 있던 차에, 그럼 예수님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원함. 3절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과연 그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자하여 보러 나갔으나 키가 작아 자기 앞으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냥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겠지라고 순간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다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마음이 컸던지라 자신의 앞을 지나친 예수님을 다시 보기 위해 3절에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가 나무에 올가간다.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앞쪽으로 달려가서(1), 나무위로 올라(2)갔다. 2개의 행동, 동사가 나오는데, 그의 적극성, 간절함이 표현되었다. 혹시나 또 지나칠까봐, 용기를 내어 달려가서, 체면에, 나이에 부끄러울 수 있었지만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보기를 원할까? 살아계신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지... 1절에서 6절까지 보다라는 동사가 4번이나 나온다,, 그만큼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사람의 눈을 의식한 삭개오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설명한다.
보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달려가서 올라가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토록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 그러나 정작 그자리를 지나가시던 주님이 먼저 쳐다 보시고(5절)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는 제의를 하심으로 초청을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을 단지 보기를 소원하고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 에수님은 보는 것으로써의 만남이 아닌 그를 영접케하시고 함께하심을 은헤를 주셨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의 초청에 즐거이 영접하는 삭개오, 그의 마음이 변했다. 사람의 시선에 가장 민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재산을 주님을 영접한 뒤에는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했는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드리고 영접함으로...
우리 하루 하루의 삶속에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러기 위해 행동하고 그를 내 삶에 현실속에 영접하고 들어오시고 같이 식사하시고 유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 오늘도 제 초라하고 볼품없는 제 삶에 현실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달려갑니다. 올라갑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해주옵소서.
그냥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겠지라고 순간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다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마음이 컸던지라 자신의 앞을 지나친 예수님을 다시 보기 위해 3절에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가 나무에 올가간다.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앞쪽으로 달려가서(1), 나무위로 올라(2)갔다. 2개의 행동, 동사가 나오는데, 그의 적극성, 간절함이 표현되었다. 혹시나 또 지나칠까봐, 용기를 내어 달려가서, 체면에, 나이에 부끄러울 수 있었지만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보기를 원할까? 살아계신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지... 1절에서 6절까지 보다라는 동사가 4번이나 나온다,, 그만큼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사람의 눈을 의식한 삭개오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설명한다.
보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달려가서 올라가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토록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 그러나 정작 그자리를 지나가시던 주님이 먼저 쳐다 보시고(5절)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는 제의를 하심으로 초청을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을 단지 보기를 소원하고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 에수님은 보는 것으로써의 만남이 아닌 그를 영접케하시고 함께하심을 은헤를 주셨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의 초청에 즐거이 영접하는 삭개오, 그의 마음이 변했다. 사람의 시선에 가장 민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재산을 주님을 영접한 뒤에는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했는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드리고 영접함으로...
우리 하루 하루의 삶속에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러기 위해 행동하고 그를 내 삶에 현실속에 영접하고 들어오시고 같이 식사하시고 유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 오늘도 제 초라하고 볼품없는 제 삶에 현실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달려갑니다. 올라갑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해주옵소서.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누가복음 15장 - 잃었던 것을 찾음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비유하여 잃었던 것은 찾는다고 비유하심.
4절에 잃은 양을 찾다, 8절 잃은 드라크마을 찾다. 그러면서 7절과 10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면... 회개는 찾는 것이다, 다시 그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로써의 칭의받은 의인으로써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잃어버린 신앙, 양심, 믿음, 진실 그자리에서 잘못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리를 찾아 오는 것이 회개다. 비록 잠시 잃어버린 양처럼 드라크마처럼 죄를 짓고 원래의 자리에서 잃어버린바 된 현실에서 자시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11절에 다시 탕자의 비유을 들으시면서 18절에 탕자가 자신을 잘못을 깨닫고 잃어버린 아들의 자리를 한탄하면서 그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자신은 아들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도 않했으나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자 아버지의 아들로써의 자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갈 수 없지만 현재의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를 찾아 갈때 하나님이 자녀로써의 본래 자리로 회복 시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주님 이죄인 이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 믿음의 자리를 찾아 갑니다. 죄의 고백과 진정한 회개를 하오니 받아주시고 제자리를 회복시켜주시옵소서.
4절에 잃은 양을 찾다, 8절 잃은 드라크마을 찾다. 그러면서 7절과 10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면... 회개는 찾는 것이다, 다시 그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로써의 칭의받은 의인으로써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잃어버린 신앙, 양심, 믿음, 진실 그자리에서 잘못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리를 찾아 오는 것이 회개다. 비록 잠시 잃어버린 양처럼 드라크마처럼 죄를 짓고 원래의 자리에서 잃어버린바 된 현실에서 자시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11절에 다시 탕자의 비유을 들으시면서 18절에 탕자가 자신을 잘못을 깨닫고 잃어버린 아들의 자리를 한탄하면서 그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자신은 아들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도 않했으나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자 아버지의 아들로써의 자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갈 수 없지만 현재의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를 찾아 갈때 하나님이 자녀로써의 본래 자리로 회복 시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주님 이죄인 이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 믿음의 자리를 찾아 갑니다. 죄의 고백과 진정한 회개를 하오니 받아주시고 제자리를 회복시켜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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