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벼룩으로 인한 감사

<피난처>를 쓴 코리텐 붐 여사느 유내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어니 베시와 함께 나치수용소에 감금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갇혀있는 중에도 어렵게 성경책을 구해 날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말씀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을 깊이 새겨둔 그녀는 얼마후 언니 베시와 더 열악한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최악이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벼룩까지 들끓어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습니다. 언니 베시는 이런 비참한 환경까지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베시가 눈을 감고 나지막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코리는 할 수 없이 "아멘"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그녀는 벼룩으로 인해 감방 주위에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하지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자유롭게 성경을 읽으며 교제를 나눌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 종류의 감사

첫째는 만일(if)의 감사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소원을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조건부 감사를 말합니다.

둘째는 때문에(Because)감사합니다.
과거를 가만히 돌이켜 보고 좋았던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취직이 되어서 감사합니다, 병을 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마 이런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도 드뭅니다. 모두가 자기가 잘나서 축복받은
줄 알고 때문에 감사 조차 고백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이런 때문에 감사를 뛰어넘어 다음 단계의 감사까지 가야합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합니다.
내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병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을때 자족할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일 큰 능력

감사는 결국 선택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불평은 사탄을 기쁘게 만듭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듯이고 불평은 사탄의 뜻입니다.

감사를 택하든 불평을 택하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결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환경에서도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삶은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불평하기도 작정한 사람의 인생은 피곤하고 고독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얼굴빛을 평온하게 만들지만, 불평은 우리의 얼굴빛을
짜증스럽게 만듭니다.

능력중에 제일 큰 능력은 감사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

감사의 시작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감사하는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이 되고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도 행복해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처한 특수 상태,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러가지
선물을 주의 깊게 그리고 세심하게 하나씩 주목하는 데 달려있다.
그럼으러써 우리의 온 삶은 감사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과 평온과
평강으로 충만해진다. - H.E.매닝.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출16:13 만나는 진 주위에, 메추라기는 진에 덮으시고

예전에 출애굽기 성경공부를 하다 이 대목에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가장 적합하고 잘 맞는 방법으로 계획성 있게 일용할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에 큰 은혜를 받아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의 일상에도 섬세하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해 본다.

13절에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얼마나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인가?
아침에 이슬같이 진 주위에 내려주시는 만나, 광야에 먼지가 많은데다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사는 진에는
숨 쉴수도 없을 정도의 먼지로 어떠한 환경인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 다들 잠든 새벽에 사람의 움직임이없고 먼지 날리지 않는 조용한 아침에 만나를 이슬같이 내리시어 깨끗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만나를 먹이시려는 주님에 배려에 아니 놀랄 수 가 없다.
그것 뿐인가? 만나는 진 주위에, 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나 진 위에 또는 메추라기를 보내시듯 진에 덮으시지 않고 1/4로  나누어 2백만의 백성들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나누어 Caos가 생기지 않도록하시고, 또 모든 사람이 만나를 주으러 나가게 하지 않으시고 각 가족의 대표 한 사람이 나가 가족수대로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다. 만약 이런 세심한 배려 없었다면 2백만명이 우루루 나가 먼저 거두려는 사람, 늦게 도착한 사람과 엉키고 섞여 싸우고 제대로 거두지도 못하고 오히려 발에 밟히는 것이 정작 거두는 것 보다 많아 만나를 먹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매일 만나로 2백만명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계획성 있고 가장 현명하고 상황에 적합한 방법으로 내려주시고 먹이시는 배려에 한번 더 놀랐다.

메추라기는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하는 습관이 있으며, 날아다닐 수 있어 만나처럼 진 주위에 내시셨으면 메추라기를 잡느라 시간을 다보내고 결국 몇 마리 잡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을 우려하신 하나님이 저녁시간 그것도 식사시간에 가까이 진이 덮이도록 진안에 내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각각의 텐트 앞에 날아가지도 못하고 슆게 잡을 수 있도록 진안과 진 위에 덮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세심한 배려인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아주 세심하고 배려있게 또 계획성있게 배푸셨을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과연 우리의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나의 환경과 나의 형편과 나의 성격과 나의 취향과 나의 Style에 맞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우리가 접하는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너무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취향대로 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은 해보았는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로는 하면서 우리의 삶속에 이렇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계획성있게 우리에게 딱 맞게 영적, 육적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배가 불러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해서 내려주신 만나를 기름에 튀긴 단 과자로 하찮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제는 배고파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어놓고 이렇게까지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에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한번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너무 우리에게 딱 맞기에, 너무 우리의 생활에 편안하고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받기에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잊어 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주님, 저의 이 초라한 삶속에 함께하시어 제게 꼭 맞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내 환경에 맞게 제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일용할 육적, 영적인 양식을 먹여 주시는 주님을 모르고 제가 잘해서, 제가 원했기에 된 것처럼 감각없이 감사없이 지냈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의 세심하고 배려있는 공급과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요10장14절 ...서로 잘 알고 지내나?, 양의 문 아니면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에는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된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절에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문지기가 문을 열면 그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7절에는 문지기는 커녕 생명도 없는 나무로 된 문, 양의 문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다시 이르시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를 위해 생명도 없는 양들의 몸에 부딛치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지키고 버텨주는 문이라 말씀하신다"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기때문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하셨을까?

양들이 울타리안에서 보호받고 생명을 보존받기위해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와야 하기에 양의 문은 양들에게 생명의 문이요, 양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이기에 양의 문이기를 자청하신 것이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드러가면 구우너으 ㄹ받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들어온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울타리에 들어온 양이 살아가는데, 생명을 이어가기 충분한 것인가? 양의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다 끝인 것인가? 구원을 얻었다고 신앙이 자라가는가?

9월 하반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만,"...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하셨다. 문 안으로 들어온 양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속에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려면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문으로써의 예수님만을 믿고 바라봐서는 충분하지가 않는 것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가야 푸른 초원의 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매일의 삶 속에 꼴을 먹이시려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10절에 생명을 얻데하되 풍성한 매일 매일의 삶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을 주신 예수님,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써 구원받은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수님의 문으로 한번 들어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따라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꼴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가? 매일 매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예수님이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양의 문이셨던 예수님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에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알아야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계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재훈아! 오늘도 푸른 초장으로 나가 꼴을 먹으러 가자 하시는데 혹 나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그의 음성을 못 알아듣기에 따라나가질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 분의 음성을 듣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을 잘 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해 잘 알고 지내는지?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지내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알고 지내는 삶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떻게 알고 지내셨는가?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알고 지내는 것처럼하면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30절에 예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알고 지내시는 관계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되어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알듯이 잘아는 것같이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예수님의 음성이 어떠한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느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되고, 예수님의 관심이 내관심이 될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기에, 항상 듣는 예수님의 음성인지를 알기에 듣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때 나의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을 수 있기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됨을 38절에서는 ".... 아버지께서 내안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나가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할때 양의로써의 꼴을 먹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면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게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을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방향을, 방법을, 때를 알기에, 예수님의 바라는 바대로 구하기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한는대로 받게되며,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의 응답을 받지못하는가?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는 관계가 되어야한다.
서로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가 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낼 수 있는가?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것이다.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된 것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삶,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삶을 살때 비로써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성품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야한다...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하나되고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음성을 듣고 알아 오늘도, 내일도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을 따라 나가 꼴을 먹을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닮은 작은 예수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