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솔로몬왕이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은?

우리는 가장 믿을만하고 또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오른팔과 왼팔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들을 믿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모든 것이 가하고 능하다고까지 생각을 한다.

한 기업체에서도 사장의 오른팔과 왼팔이 사장의 특별한 신임을 받으며 모든 회사의 일에 관여하고 도맡아 처리한다. 그만큼 사장이나 회장은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신뢰하고 그들을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오른편엔 변호사, 왼편에 회계사라고 까지 하며 자신을 받쳐주고 세워주고 능력을 주는 사람은 바로 그의 오른팔과 왼팔이라고 믿고있는 것이다.

검은 양복의 조직(?) 아저씨들도 두목이 있고 그의 옆에는 항상 오른팔과 왼팔이 지켜서서 두목에게 믿음을 주고 그 두목을 보호하고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을 그들만이 한다. 두목이나 그 조직의 영향력과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활을 바로 오른팔과 왼팔이 하며, 두목을 세워주고 그에게 능력을 더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솔로몬왕도 당시 오른팔과 왼팔이 그에게 있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고 믿고 따르던 그의 오른팔과  왼팔, 그가 지혜롭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며 장본인이 바로 그의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솔로몬왕의 오른팔과 왼팔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놋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열상7장21절에 보면 "이 두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하고 왼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왕이 옆에 두고 모든 일에 의지하고 신뢰하며 세웠던 그의 오른팔과 왼팔은 놋으로 만든 두 기둥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궁에서 아침 저녁으로 볼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나 볼수 있도록 성전 앞에 오른편과 왼편에 높이 10M에 가까운 아주 높은 기둥을 세우고 오른편 기둥의 이름을 야긴 즉 "저가 세우리라"라고 명명하고, 또 왼편 기둥의 이름을 보아스 즉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명명하고 그가 오직 의지하고 그의 삶을 맡기고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신뢰자인 오른팔과 왼팔을 야긴과 보아스로 세운 것이다.

유능하고 지혜로우며 최고인 믿을 만한 사람을 세운 것이아니라, 오직 그가 왕이되고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고, 그를 세우시고 그를 왕으로 삼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야긴,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오른팔 기둥을 세우고, 그가 지혜롭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며 이 모든 것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보아스,  "하나님께 능력이 있음을, 모든 것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라는 왼팔의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인간적인 오른팔과 왼팔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의지로 성전앞에 오른편과 왼편의 기둥을 세웠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오른팔과 왼팔을 자랑하며, 그들이 우리를 살리고 세우는 줄 알고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아직도 우리의 오른팔과 왼팔을 의지한체 우리가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이루겠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솔로몬왕이 전무후문한 모든 부귀영화와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은 바로 하나님이었으며, 하나님의 대한 신앙으로 두 기둥을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를 세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잊지않기위해 바로 그 놋 기둥을 세운 것이다.

주님!,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 모두 내려놓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우리 마음에 오른편에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기둥과, 왼편에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는 기둥을 세워 우리의 날마다의 고백이 되게하여주옵소서.
모든 능력과 힘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솔로몬왕이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듣는 마음이었다.

다윗의 아들이자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와은 우리가 다 아는대로 당대에 아니 전무후무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었다. 분명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부어주셔서 그가 그 모든 것을 누린 것이다.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실까 물을때 우리는 지혜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귀영화를 구하지않고 백성을 잘 다스리기위한 지혜를 구한 착한 솔로몬왕에게 지혜는 물론 구하지않은 부귀영화를 주셨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말씀을 이해해보면 솔로몬왕이 실제적으로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닌 "듣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개혁개정 성경에 열왕기상 3장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전 성경 개혁한글에는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헤로운 마음을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지혜 자체를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 "듣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것과 지혜로운 마음 또는 듣는 마음을 구하는 것에 무엇이 다른가?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그 받은 지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 즉, 재판을 잘 하겠다는 것이지만,
듣는 마음이란 재판을 하기위한 수단보다는 판단과 재판을 하기 이전에 잘못을 정죄하고 징계하는데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죄를 질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살아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갔는지, 각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귀를 열어 듣고 각각의 형편을 잘 해아리겠다는 것이다.

자로 줄을 제고 저울로 무게를 재겠다는 지혜가 아닌 각 사람의 형편과 사정,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 곧 듣는 마음을 달라고 솔로몬왕은 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자기 백성의 각 환경과 형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며,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려는 긍휼의 마음인 것이다.

솔로몬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이다.
그래서, 3장10절에 "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개혁 한글에는 ".....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솔로몬의 요구에 흡족해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는 솔로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한 솔로몬이 얼마나 이쁘고 자랑스러우셨으면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주셨겠는가?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34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기에 구하지 않은 모든 것들로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구한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맞는지 맞지않는지 알기위해 지혜를 달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떻게 실수하지 않고 결정을 잘해야할 지를 구하고 있다.
우리가 잘 하고자 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지,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해야하지 않을까?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듣는 마음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다윗 왕이 미련한 행동을 하고 난뒤....

다윗 왕은 인생 말년에 하나님 앞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과 보호하심, 또 모든 전쟁에서 군데의 숫자보다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케 하시는 그분을 의지하지않고 전쟁에 나갈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숫자를 세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

사무엘하를 마치면서 24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징계하시기위해 다윗 왕을 경동시키시어 인구조사를 하게끔하신다.(삼하24:1) 
어찌보면 이번에는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인구조사를 하게끔하시고 그 일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인데 다윗에게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지않은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시고 징계하시기 위해 다윗을 격동시켜 원하지도 않던 인구조사를 하시게 한 하나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해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 왕은 10절에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나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그의 마음을 자책하게 했고, 큰 죄를 범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심히 미련한 행동을 했냐고 하고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 왜 저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원하지도 않는 인구조사를 하게끔 하시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어 칠만명의 많은 사람들을 죽이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왜 저에게 뒤집어 씌우십니까? 라고 반문을 하고 불평을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의해 진행된 일에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하며 미련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 다윗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도록 방관한 자신의 잘못을 자책했기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하게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실때 하나님께 중보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푸실 것을 기도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잘못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보시고 징계를 하시어 고쳐주기를 원하셨지만 사실 징계를 원하시지는 않으셨다.
16절에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꼐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이르시되 ㅣ족하다..."하시며 재앙을 내리심에 마음아파하시며 후회하고 계신 것이다.

다윗이 만일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인구조사를 하게끔 하실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것을 뉘우치신 것 같이, 징계를 하시려했던 마음을 분명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리셨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인생 말년에 접어들며 기도하지 않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그의 잘못을 돌이켜 보면서 그의 행동이 미련했으며, 큰 범죄를 했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절인 25절에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꼐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라고 기록하면서 사무엘하서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다윗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것이다.

처음부터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해했던 지난 과거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보의 기도를 올렸다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조차 내리지 않으셨을 것을 그는 미련하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대로 인구조사를 행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태해지고 기도생활에서 멀어질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할하지않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되어있을때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징계하시려고? 아니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고 회계하며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바라시기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기에, 미련한 행동을 하지않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한 행동을 하게 되기때문이다.

사무엘상 12장23절에 사무엘은 그래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하여주시고 깨어있게 하여주옵소서. 주위를 돌아보지못하고 제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여 살다가 미련한 행동을 하여 자책하지않도록 지켜주시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삻에 깊이 개입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나에대한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였다. 왜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 합한 사람이었을까?
분명 여러가지의 이유가 있다. 사무엘하 16장5절 - 14절에 나오는 내용 또한 다윗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아니었나 묵상해본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힘 한번 안써보고(힘을 못쓴 것이 아니라 분명 일부러 맞서지 않았다) 도망을 나와 바후림에 이르렀을때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왕을 저주하며 계속 쫏아왔다.
그 뿐만 아니라 돌을 던지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5절-8절)
그때 그 옆에서 도저히 계속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데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하소소 하니"(9절)하고 청하자, 다른 왕이었으면 말도 할 필요없이 눈짓으로 당장에 가서 목을 베라고 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예루살렘을 도망나온 것도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데 어디 함부로 입을 놀려 저주를 하냐며 첫 마디를 했을때에 바로 창을 던지던지 부하를 시켜 그의 입을 막고 목을 베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왕은 어떻게 말하고 있나?
10절 "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꼐서 그에게 다위으 ㄹ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하고"
11절 "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에게 쫏겨 다니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렵게 왕이된 그에게 자신의 아들에게 또 도망을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것과 그것을 비웃고 저주하는 것이 바로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않은가?

그 악한 사람의 입을 통해 다윗 자신에게 쏟아붇는 저주의 말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명령하셨기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왕으로 등극해서 좋은 나날을 보낼때만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자신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는 이 일도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하심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첫 아들 암놈의 잘못과 압살롬의 잘못을 아버지로써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잘못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오히려 다윗왕을 징계하시고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죄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입을 통해 그를 저주하게 하시고 그의 잘못의 지적하고 계심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저주하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왜그래?" 하면서 대항하던지 그에 대해 복수로 더 심한 저주의 말과 행동으로 돌려주지는 않는지?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위왕 처럼 혹 우리가 저지른 잘못과 죄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질책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며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지는 못하는가?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되려면 다위왕이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 사람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1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하고"12절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잘못하고 죄지을때 우리를 향해 저주하며 돌을 던지는 사람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게 개입하시고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하시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왕,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통해 그가 가졌던 삶의 원칙과 신앙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않았나 생각이 든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왕이 되는 길은 너무나 길고 힘들며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는  험한 길이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24장 2절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갈새" 다윗이 있는 곳으로 싸움에 능한 군인 삼천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미친짓까지하면서 도망다니며 살던 다윗에게 이런 쫓기는 삶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주시는 일이 벌어졌다.

다윗과 같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며 뒤를 보고 있는 사울왕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24장4절)
그러나 결국 사울왕을 죽이지를 못하고 그의 옷자락 조금을 벤것마저도 마음에 찔려(5절) 괴로워했다.

그는 10절에 사울왕에게 소리높여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자기의 손에 넘기셨으나 12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려하는 사울왕을 자신의 손에 넘기시는 좋은 기회를 주셨고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왕,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실 것이라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손을 델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말은 상황적으로 기회인것 같지만, 사울왕을 죽여야 자신을 왕으로 삼으시고 기름을 부은 하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 같은 기회였지만 이 기회를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고 자신의 손을 들어 사울왕을 죽일 수 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기회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26장에 또 다시 한번 사울왕을 죽이고 다윗 자신이 이제는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었졌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광야로 내려갔을때 저녁때가 되어 모든 사람이 잠들었을때 아니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셨을때 12절"다윗이 사울의 머리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못하고 깨어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이라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더 확실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면 않되는 것이다. 다윗이 이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이 좋은 기회를 만드셨기때문에 어쩌면 사울왕을 죽여도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평생 사울왕을 피해다니고 광야와 굴로 도망다녀야 하는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버리셧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 하나님의 인도이자 섭리라고 확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아비새도 8절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라고 말하고 있지않는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사울왕을 죽인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가 죽인 것이니 자신은 더더욱 떳떳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10-11절에"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자르르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하면서 사울왕이 자고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는 것 같은 상황이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알고 있었다. 이 기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인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는 상황이 또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를 보고, 거기다 분명 명분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면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곤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하나님께서 블레셋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싸워이기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하나님께 묻는 절차도 무시하고 제사도 자신이 드리는 영적 교만을 가지고 직접 행하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결국 겉으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앞에서 놓인 이 좋은 기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대로 왕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함으로 생각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장21절-22절,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페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그리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는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짓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이런 좋은 기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것 이다.

바로 다윗이 그랬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40년간을 쫓아다닐때 도망다니는 신세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비록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그런 삶을 벗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사용하지않고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뤄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주님!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기다리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과 기회를 보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 어리석은 사울왕 같은 사람이 되지않게하여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은 분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마태복음 6장34절 - 개혁개정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내일 걱정은 내일하고 오늘은 오늘의 걱정으로 족하니 내일 일까지 신경 쓰지말아야한다고 이해해왔다.
이전 성경에도 "....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되어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개혁개정에는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한다.

깊이있게 집중해서 읽지않으면 같은 얘기인 것 같으나, 분명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 성경에도 내일 염려하라고 되어있지않고,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번역되어있다.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껏 내일 일에 오늘 염려하지말고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왔으나, 성경은 염려할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때 내일이라는 시간적 개념에 우리의 포커스를 맞추고 이 말씀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 내일 염려는 내일되면 염려해야하는 것처럼, 또 우리는 염려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날그날의 염려만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면서 살라고 하지않는다. 아니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염려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우리가 어찌 염려하면서 살수 있겠는가? 그것도 염려를 하되 그날그날의 염려만하라는 말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이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염려를 하지말라는데에, 또 우리의 염려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떤 것에 염려를 해야하는지의 촛점과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34절 이전 말씀인 33절에 우리가 다 알고 외우는 말씀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나서 바로 34절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세상살이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보시고 염려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그것 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먼저 해야할 일, 바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 즉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는데 걱정하며 염려하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필요한 부분들을 더해주시고,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또 염려할 이유가 없도록 해결해 주신다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일 일의 걱정은 내가, 우리가 아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라는 것이다.내일 이뤄져야할 주님의 뜻과 목적,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할때 그 뜻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상살이의 걱정과 염려가 내일이라는 시간에 맞추어 알아서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염려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늘 이땅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붙들고 고민하면서 살았다면 오늘의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는 이미 해결해 주셨고, 내일 또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되면 그 뜻을 이뤄가며 사는 내일의 삶속에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것을 가지고 염려를 해왔고 내일 일에 대한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도 염려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염려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에 대한 염려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지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6장 32절이전에 보면 25절, "...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일상, 하루하루의 삶속에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에 대해서 30절, 믿음이 적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말라고 설명을 하신뒤, 33절과 34절의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34절에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구하고 이뤄나가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고 살았습니다. 이 땅에 저희를 보내실때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뤄나가는 삶을 살기위해 고민하고 그 뜻대로 살기위해 염려하는 삶을 살지못했습니다. 하루하루 또 그날그날의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과 목적을 온전히 이뤄 나가시기를 염려하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