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30일 금요일

히스기야왕의 기도의 응답을 받는 형통함

히스기야왕의 기도의 응답을 받는 형통함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하셨던 하나님은 히스기야왕의 삶도 형통하게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열왕기하18장7절
요셉과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히스기야왕과 함께하시며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왕의 삶을 형통하게 하신 것은 6절에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라고 하면서 그가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의 삶이 형통했다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통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7절에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7절 말씀이 형통하였더라라고 끝맺지않고 이어서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아니하였더라말하고 있다.
얼핏보면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했으니 그가 당시 이스라엘을 무너트리고 유다까지 유협하고 있는 앗수르왕 산헤립을 배신하고 섬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시겠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정 반대로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된다.

13절-16절, 앗수르왕 산헤립은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점령하고 조공을 받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주고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도 벗기어 주었으며, 산헤립왕은 절대로 여호와가 자기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비난하였으며 백성들에게까지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말라며 완전히 그를 비방하며 그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지경까지 가게되는데 이 어찌 형통한 삶이며 길이란 것인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삶을 형통하게 하셨다고 하는데 그럼 어떤 형통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형통을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통은 아무것도 않해도 모든 일이 저절로 다 잘되는 기적같은 형통이 아니라 비록 하나님를 떠나지 않고 그의 말씀대로 살기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의 뜻가운데 그를 신뢰하고 기도할때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시며 그 기도의 답을 주시는 형통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앗수르왕 산헤립이 하나님과 히스기야왕을 비방하는 편지를 사자의 손에 보내자 히스기야는 열왕기하19장14절,15절에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방하는 그 편지를 펼쳐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먼저 한 것은 그 손에 쥐어진 편지, 그 문제 그 어려움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19장20절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함께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형통함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함인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질 않아도 원하는 대로, 정한 소원대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과 고난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형통을 얘기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35절에 "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명르 친지라 아침에 일찌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그리고 산헤립왕도 결국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칼에 맞게 죽게된다.(37절)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형통함을 얻게되었다.

또 한번 하나님의 형통함을 누렸던 일은 다 잘아는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신 일이다.
20장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겠다고 집을 정리하라고 하실때 2절에"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5절에"...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다.

형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아야한다. 그래야 어떤 환경과 어려움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형통함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는가? 우리의 삶이 생각대로 잘 안풀린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이 없기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함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필요할때만 기도하여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사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과 연합하여 함께하는 하나님 뜻안에서의 삶, 그 속에서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형통함을 경험해야한다.

아버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살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뜻안에서 기도할때 응답해주시고 삶을 인도해주시는 형통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2월 16일 금요일

"그 청년 바보의사 - 안수현"

얼마전에 읽은 "그 청년 바보의사 - 안수현" 책에 대해 받은 감동에 대해 나눌까한다.


메마른 이 시대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맡겨주신 영혼을 그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던 청년, 그의 삶의 전체가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되어 최우선을 예수님께 맞쳐 살았던 바보같은 고안수현의사에 대해 벅차고 감동된 마음으로 또 내 자신이 부끄럽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의 짧은 삶을 전개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든 시간과 삶을 받쳐 예수님 처럼 살다가 예수님의 나이 33세로 주님 품으로 돌아간 청년 의사 아니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그의 삶은 정말 24시간 온전히 예수님만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 또 예수님 처럼 살았던 바보 같은 의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참 의사'였기때문입니다. 환자의 살이 베일때 아프겠거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베인 것처럼 아파하기한 쉽지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파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마치 자신의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했습니다.>pag.9-시골의사 박경철이 안수현 의사를 생각하며....


그 어려운 의과 공부를 하는 의대생으로써 자신의 잠을 줄여가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며 성경공부 리더와 찬양팀 리더의 사역외 많은 일을 감당했으며, 시험기간이나 중요한 학과 모임보다는 하나님 앞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붙들며 남들의 조롱에도 또 바보같다는 비아냥에도 묵묵히 그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했기에 재수를 하며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도 오직 그의 삶의 최우선은 예수님이라는 신앙으로 예수님께만 집중을 하며 살았다. 


인턴과 레지던트시절에도 고대 안암병원을 다니며 암 환자들의 병 치료는 물론 환자들을 치료하는 영혼의 의사 역활까지 담당했다. 아니 영혼 의사가 우선이었다. 그는 항상 손에 신앙서적과 찬양 테이프를 들고 다니며 병으로 낙심하고 절망에 빠진 환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그들의 손과 발이되어 그들의 병은 물론 영혼을 살리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그가 의사로써의 존재 목적으로 삼았다.


<그 청년의사는 환자와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눈도 안마주치고 할 말만하고 휙 돌아서는 그런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많이 아프시냐고 묻기도 하고, 빨리 처치를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웃어주기도 하고, 간호하는 아들이 잘 생겼다고 덕담도 해주었습니다. 또 입원 첫날부터 한 밤중이면 찾아와 환자의 침대 곁에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루는 간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할아버지가 갑갑증을 느껴 죽으면 그만이지 하며 링거바늘을 빼버리고 행패를 부리며 병실 바닥에 피로 물들게 하며 난동을 부릴때 이 청년 의사는 할아버지를 끌어 안으며 "할아버지 힘드신 거 다 알아요. 살기 싫으신 것 다 알아요"하며 그의 마음을 위로하자 할아버지는 황소처럼 목 놓아 오래오래 울었습니다.> pag.16
그 청년 바보 의사는 직업으로써의 의사가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진정 환자들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사랑하는 참 의사였던 것이다. 


그가 치료하는 모든 환자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비록 육신은 병들어 죽어가지만 영혼은 살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그들을 진정 사랑했습니다.


그는 항상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를 되새기며 삶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결정과 말과 행동을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2000년 8월 의약분업으로 의료계가 파업중으로 전국의 모든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 환자들만을 방치해 두고 있을때 그는 모든 의사들의 눈초리와 그 뒤에 감당해야할 책임과 비판에는 관심없이 그는 안암병원을 홀로 지키며, 아픔을 호소하며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환자들에게 밤을 새며 돌보아주고 복음을 전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사랑하며 살았던 그 청년 바보 의사 안수현.
2005년 11월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결국 2006년 1월5일 폐출혈과 위장출혈이 시작되면서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어딜 가나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당당하게 드러냈습니다. 글을 쓸 때도, 사람을 만날때도, 무얼 먹거나 마실때도, 그는 한결같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알려지면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 확실해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겐 그는 '밥맛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밥 맛없는' 그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했습니다. 그는 어디에 가도 그 빛을 잃지 않는 푸른 나무였고, 요동하지 않고 성전을 떠받치고 서있는 대들보였습니다.>


<그는 새벽예배를 사랑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끝나면, 단 위에 올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큰 몸을 구푸려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를 했습니다. 재수생 시절부터 그의 몸에 밴 기도 자세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서 세상을 거스르며 나갈 힘을 얻었습니다. 마치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한 방향으로 오래 순종을 하며 걸어가는 순례자처럼....>pag.227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무심코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었다

무심코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었다

이스라엘 아합왕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의지적으로 정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열상16장30절) 그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마지막을 정하시고 뜻 하신대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서 벗어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계획과 지혜를 짜내어 그 상황을 모면하려해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면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그의 뜻대로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아합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같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아람의 군대와 더불어 싸우러 나가면서 미가야 선지자가 전한 그가 전장에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합왕은 왕복을 벗고 변장한 후 나갔으나 적군 한 사람이 무심코 쏜 화살이 갑옷 솔기(두 쪽을 이은 선)에 맞고 결국 죽게 된다.(열상22장34절)

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나갔음에도 죽임을 당치 않았으나 죽음에 두려워 변장까지하고 나간 아합왕은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를 결정하셨기에 무심코 활을 당겨 쏜 화살이 아합왕을 맞췄는데 그것도 갑옷을 맞혀서는 죽지않으니 갑옷의 압쪽과 뒷 쪽을 연결하기위해 이은 실, 그 사이 (아마도 어깨나 옆구리)에 맞아 죽게된 것이다.
무심코 당긴 화살을 하나님께서는 그 화살을 정확히 갑옷의 가장 약한 부분 생명을 위협할 부분에 가서 꽂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인간이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다. 이미 정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의 힘으로 바꾸고, 지혜로 모면하려는 가장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합왕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일에서 돌이키는 것이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임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대항하려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닌지 돌이켜 봐야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나님의 뜻과 무관한)이 아닌 선(하나님의 뜻과 일치한)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바꾸어 보려는 노력을 하는데 결국 하나님은 의지대로 무심코 한 사람의 내 던진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연 같고, 무심코 일어난 일들 같지만 하나님의 깊이 개입하심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유심히 들여다 보면 무심코가 결코 무심코가 아닌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을 우리는 느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 우리의 삶에 깊히 개입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시는 일을 보게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하시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게하여 주옵서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하나님은 사명보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사명보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모든 촛점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은 중요하고 반듯이 지켜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에만 집중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사소하게 명령하신 것에 소홀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사실 사명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것은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곤한다.

열왕기산13장에 보면 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온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세우셔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왕에게 가서 심판을 경고하고 그가 세운 산당과 우상들을 심판하시리라는 말씀을 전하라는 큰 사명을 받았다.
유다에서부터 벧엘에까지 가서 마침 제단에 서서 분향하는 여로보암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주신 경고와 징계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한다.

열상13장 2절 "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아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붙잡혀 줄을 수도 있었지만 목숨도 감수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잘 이행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대한 사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지친 몸을 다시 이끌고 절대 떡이나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도 되돌아가지 말고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열상13장8절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절에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하고"

여로보암왕은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에 두려워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거둬달라 기도를 부탁을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붙들고 집에 가서 쉬라하며 예물을 받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정말 여로보암의 유혹을 잘 물리치고 넘겼다.
아니 그 상황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는지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잘 감당했으니 힘들고 지치고 두려웠던 그 상황을 빨리 모면 하고 싶었을 수 도 있다.
그렇게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 곳을 빠져 나왔지만 지쳐있던 그 하나님의 사람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때 문제가 터지고 만다.

열상13장14절 "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1절에 보면 "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바로 이 늙은 선지자가 이 하나님의 사람을 유혹한 것이다. 왜 늙은 선지자였는가, 늙었다는 말은 나이가 늙었기 때문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으 교제, 교통이 없어 나이만 먹어 늙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는 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거짓으로 자기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열상 13장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시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안그래도 지쳐있고 굶주린 그에게 이 늙은 선지자의 말은 정말 호의적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렸다. 사소해 보였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남아서 떡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아니 굶주림과 지친몸때문에 기억 조차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여기서 두가지의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첫째 이 늙은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선지자라도 하나님과 일상에서의 깊은 교제가 지속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남을 실족시키며 죄를 짓게하는 처지에 갈 수 밖에 없다는 거이며, 둘째로는 이 하나님의 사람처럼 하나님은 자신이 주시는 사명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명자는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어떻게 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람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으면 또 다른 사람을 보내셨을 것이고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경고와 징계의 말씀을 분명히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시고 세우실때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지를 보시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명보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몰랐던 이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늙은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못하게 되고 결국 그는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어 뜯게 죽게되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된다.
열상13장 24절 "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그를 만나 물어 죽이매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서 있고 사자도 그 시체곁에 서 있더라"

우리는 하나님께 사명을 달라고 구한다. 또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정작 그 사명에 앞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마음과 믿음이 없다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한들 하나님께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명감당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주님,  사명감당하기에 두렵고 떨립니다. 분명 사명을 잘 감당해야합니다. 그러나 사명 감당에 앞서 이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세우시지만 이 사명보다는 우리에게 더 관심이 있음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사명보다는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하나님의 성전은 왜 기도하는 집이며, 기도하는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면서 크게 화를 내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전에서 환전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채찍으로 그들을 쫓으시고 상을 뒤 엎으신 일이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21:13라 하시면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이사야 56장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성전은 왜 기도하는 집인가? 또 기도하는 집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위해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의 시대로 다시 내려가봐야 할 것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그는 문명히 알고 있었다. 스스로 계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성전에 계시지않는 다는 것을 또 그가 아름답고 멋지게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거하시라고 건축하지는 않았음을 열상8장 27절에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며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돌로 건축한 성전에 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 솔로몬은 왜 성전을 건축했는가?

28절에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하며 그가 이 성전에서 기도와 간구로 고할때 들어달라고 구하고 있다.
또 29절(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절(주의 종과 주의 백성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때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34절(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기도하며 간구하거든 들으시고) , 36절(이 곳을 향하여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38절(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들으시고), 39절(...들으시고), 43절(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기도하거든....들으시고), 45절(기도하거든...들으시고), 49절(기도하거든...들으시고), 52절(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고),

무려 10번이나 반복 또 반복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솔로몬왕과 이스라엘백성이 각각 또는 온 백성 전체가 어떤 이유에서나 간구하고 기도하면 들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바로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께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와서 간구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십사 또 들어주시리라는 기도의 집이 되기를 바라고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하늘들의 하늘도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건축한 성전에는 거하시지 못하지만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간구하면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의 집이요 하나님께 들으신바되는 기도가 되고 응답이 되는 기도의 집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열상9장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라고 하시며 이 성전에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며 그 곳에 와서 경배하고 각각의 사정을 안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백성에게 눈길을 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영원히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성전을 주를 찾는 모든이들의 기도의 집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두시고, 그의 눈길과 마음을 영원히 두시겠다 약속을 하시는 것이다.

그럼, 기도의 집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56장6절-7절에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 하시면서, 먼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긴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집은 단순히 우리의 간구와 기도제목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을 드려야 한다, 경배와 찬양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은 답변으로는 그 하나님의 성전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즉 그들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연합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은 영광과 찬양 받으시길 합당한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드리고 그들의 기도제목을 드릴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교제 바로 연합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또는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다면 즉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하나님께 얘기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응답하시는 대화하고 교제하는 깊은 연합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면서 살아 역사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위해 연합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던 것이다. 백성들의 슬픔과 어려움을 아뢰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움직여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하고 연합할 수 있는 그런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주님, 주의 성전에서 주님과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저희의 모든 기도를 드리며 그에 대해 응답하시고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대화하고 깊은 교제를 하는 연합이 있게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 몸이 주의 성전인 것처럼, 우리의 영과 몸이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속에서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몸소 행하여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직접 건축을 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직접 건축을 하신다.

솔로몬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사실은 우리가 잘안다. 아버지 다윗왕이 성전 건축을 원했으나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는가?, 또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는가?

열상8장16절에 보면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성전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위해 좋은 장소를 찾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한국에 명당이라는 말이 있는데, 풍수지리상 가장 좋은 자리가 아니라, 또 장사꾼들이 좋아하는 몫이 좋은 자리가 아니며, 안전하고 교통이 좋은 자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위해 장소를 개의치 않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장소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좋은 장소보다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적합한 사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장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이 중요한데 다윗왕의 마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도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기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려야한다. 다윗왕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 백성들을 준비시켜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다윗왕은 무엇을 어떻게 다스렸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를 가르치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인지를 가르치고 그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렸던 것이다. 그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올바로 하나님을 섬기기 하기위하여 먼저 그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준비를 시키게끔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땀과 노력으로 지어진 멋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과 헌신으로 하나님을 섦기기위해 준비된 다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올바르고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장소를 찾는데 모든 관심과 열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과  올바른 믿음을 먼저 가지는데 우선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먼저 준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또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성전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어느 성읍도 택하지 않으셨으며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스릴 다윗왕을 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도 결국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고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를 준비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전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왕이 건축을 하게된다.

열상8장 17절-19절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출하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성전은 다윗왕이 가졌던 간절한 마음으로도 건축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왕이 그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이 아니고는 건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뜻대로 건축한다는 말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성전건축을 위해 모든 재료를 준비를 시키신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축을 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전을 자신의 뜻대로 건축하시기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헌신과 노력뒤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다고 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중 아무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건축하시는 것이다.

주님! 자신의 몸을 비유하신 성전도 주님께서 직접 세우셨듯이 또, 영적으로 성전인 곧 주님을 믿고 섬기는 저희들도 하나님께서 직접 건축하시고 세우시듯이 하나님의 성전, 예배처소도 하나님께서 직접 건축하시고 세우시는 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관여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친히 건축하고 세워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솔로몬왕이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은?

우리는 가장 믿을만하고 또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유능하고 똑똑한 오른팔과 왼팔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들을 믿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모든 것이 가하고 능하다고까지 생각을 한다.

한 기업체에서도 사장의 오른팔과 왼팔이 사장의 특별한 신임을 받으며 모든 회사의 일에 관여하고 도맡아 처리한다. 그만큼 사장이나 회장은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신뢰하고 그들을 믿고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오른편엔 변호사, 왼편에 회계사라고 까지 하며 자신을 받쳐주고 세워주고 능력을 주는 사람은 바로 그의 오른팔과 왼팔이라고 믿고있는 것이다.

검은 양복의 조직(?) 아저씨들도 두목이 있고 그의 옆에는 항상 오른팔과 왼팔이 지켜서서 두목에게 믿음을 주고 그 두목을 보호하고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일을 그들만이 한다. 두목이나 그 조직의 영향력과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활을 바로 오른팔과 왼팔이 하며, 두목을 세워주고 그에게 능력을 더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솔로몬왕도 당시 오른팔과 왼팔이 그에게 있었다. 그가 가장 신뢰하고 믿고 따르던 그의 오른팔과  왼팔, 그가 지혜롭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며 장본인이 바로 그의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솔로몬왕의 오른팔과 왼팔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놋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열상7장21절에 보면 "이 두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하고 왼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솔로몬왕이 옆에 두고 모든 일에 의지하고 신뢰하며 세웠던 그의 오른팔과 왼팔은 놋으로 만든 두 기둥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궁에서 아침 저녁으로 볼수 있고 또 언제 어디서나 볼수 있도록 성전 앞에 오른편과 왼편에 높이 10M에 가까운 아주 높은 기둥을 세우고 오른편 기둥의 이름을 야긴 즉 "저가 세우리라"라고 명명하고, 또 왼편 기둥의 이름을 보아스 즉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명명하고 그가 오직 의지하고 그의 삶을 맡기고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신뢰자인 오른팔과 왼팔을 야긴과 보아스로 세운 것이다.

유능하고 지혜로우며 최고인 믿을 만한 사람을 세운 것이아니라, 오직 그가 왕이되고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이어가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알고, 그를 세우시고 그를 왕으로 삼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야긴,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오른팔 기둥을 세우고, 그가 지혜롭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며 이 모든 것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보아스,  "하나님께 능력이 있음을, 모든 것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라는 왼팔의 기둥을 세운 것이다.

인간적인 오른팔과 왼팔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의지로 성전앞에 오른편과 왼편의 기둥을 세웠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오른팔과 왼팔을 자랑하며, 그들이 우리를 살리고 세우는 줄 알고 지내오지는 않았는지?
아직도 우리의 오른팔과 왼팔을 의지한체 우리가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이루겠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솔로몬왕이 전무후문한 모든 부귀영화와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믿고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은 바로 하나님이었으며, 하나님의 대한 신앙으로 두 기둥을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언제 어디서나 그를 세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잊지않기위해 바로 그 놋 기둥을 세운 것이다.

주님!,  우리가 믿고 의지했던 오른팔과 왼팔 모두 내려놓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우리 마음에 오른편에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기둥과, 왼편에 하나님께 능력이 있다는 기둥을 세워 우리의 날마다의 고백이 되게하여주옵소서.
모든 능력과 힘의 원천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1월 3일 목요일

솔로몬왕이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듣는 마음이었다.

다윗의 아들이자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와은 우리가 다 아는대로 당대에 아니 전무후무한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었다. 분명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부어주셔서 그가 그 모든 것을 누린 것이다.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주실까 물을때 우리는 지혜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귀영화를 구하지않고 백성을 잘 다스리기위한 지혜를 구한 착한 솔로몬왕에게 지혜는 물론 구하지않은 부귀영화를 주셨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말씀을 이해해보면 솔로몬왕이 실제적으로 구한 것은 지혜가 아닌 "듣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개혁개정 성경에 열왕기상 3장9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전 성경 개혁한글에는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헤로운 마음을 주사...."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지혜 자체를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마음", "듣는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것과 지혜로운 마음 또는 듣는 마음을 구하는 것에 무엇이 다른가?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그 받은 지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 즉, 재판을 잘 하겠다는 것이지만,
듣는 마음이란 재판을 하기위한 수단보다는 판단과 재판을 하기 이전에 잘못을 정죄하고 징계하는데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죄를 질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살아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갔는지, 각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귀를 열어 듣고 각각의 형편을 잘 해아리겠다는 것이다.

자로 줄을 제고 저울로 무게를 재겠다는 지혜가 아닌 각 사람의 형편과 사정,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 곧 듣는 마음을 달라고 솔로몬왕은 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자기 백성의 각 환경과 형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며,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려는 긍휼의 마음인 것이다.

솔로몬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한 것이다.
그래서, 3장10절에 "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개혁 한글에는 ".....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솔로몬의 요구에 흡족해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는 솔로몬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한 솔로몬이 얼마나 이쁘고 자랑스러우셨으면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주셨겠는가?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34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기에 구하지 않은 모든 것들로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구한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맞는지 맞지않는지 알기위해 지혜를 달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떻게 실수하지 않고 결정을 잘해야할 지를 구하고 있다.
우리가 잘 하고자 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지, 하나님의 마음을 달라고 구해야하지 않을까?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듣는 마음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0월 31일 월요일

다윗 왕이 미련한 행동을 하고 난뒤....

다윗 왕은 인생 말년에 하나님 앞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하나님의 인도하시과 보호하심, 또 모든 전쟁에서 군데의 숫자보다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케 하시는 그분을 의지하지않고 전쟁에 나갈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숫자를 세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

사무엘하를 마치면서 24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징계하시기위해 다윗 왕을 경동시키시어 인구조사를 하게끔하신다.(삼하24:1) 
어찌보면 이번에는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인구조사를 하게끔하시고 그 일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인데 다윗에게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지않은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보시고 징계하시기 위해 다윗을 격동시켜 원하지도 않던 인구조사를 하시게 한 하나님.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해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 왕은 10절에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나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그의 마음을 자책하게 했고, 큰 죄를 범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심히 미련한 행동을 했냐고 하고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 왜 저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원하지도 않는 인구조사를 하게끔 하시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어 칠만명의 많은 사람들을 죽이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데 왜 저에게 뒤집어 씌우십니까? 라고 반문을 하고 불평을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의해 진행된 일에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하며 미련한 행동을 했다고 하는 다윗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도록 방관한 자신의 잘못을 자책했기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하게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실때 하나님께 중보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푸실 것을 기도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잘못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보시고 징계를 하시어 고쳐주기를 원하셨지만 사실 징계를 원하시지는 않으셨다.
16절에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꼐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이르시되 ㅣ족하다..."하시며 재앙을 내리심에 마음아파하시며 후회하고 계신 것이다.

다윗이 만일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인구조사를 하게끔 하실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것을 뉘우치신 것 같이, 징계를 하시려했던 마음을 분명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리셨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이 인생 말년에 접어들며 기도하지 않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그의 잘못을 돌이켜 보면서 그의 행동이 미련했으며, 큰 범죄를 했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절인 25절에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꼐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라고 기록하면서 사무엘하서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다윗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것이다.

처음부터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해했던 지난 과거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보의 기도를 올렸다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조차 내리지 않으셨을 것을 그는 미련하게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대로 인구조사를 행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태해지고 기도생활에서 멀어질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할하지않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되어있을때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징계하시려고? 아니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돌아보고 회계하며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바라시기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기에, 미련한 행동을 하지않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한 행동을 하게 되기때문이다.

사무엘상 12장23절에 사무엘은 그래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께하여주시고 깨어있게 하여주옵소서. 주위를 돌아보지못하고 제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여 살다가 미련한 행동을 하여 자책하지않도록 지켜주시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삻에 깊이 개입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10월 14일 금요일

나에대한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였다. 왜 다윗왕은 하나님의 마음 합한 사람이었을까?
분명 여러가지의 이유가 있다. 사무엘하 16장5절 - 14절에 나오는 내용 또한 다윗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아니었나 묵상해본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힘 한번 안써보고(힘을 못쓴 것이 아니라 분명 일부러 맞서지 않았다) 도망을 나와 바후림에 이르렀을때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왕을 저주하며 계속 쫏아왔다.
그 뿐만 아니라 돌을 던지며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5절-8절)
그때 그 옆에서 도저히 계속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데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하소소 하니"(9절)하고 청하자, 다른 왕이었으면 말도 할 필요없이 눈짓으로 당장에 가서 목을 베라고 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예루살렘을 도망나온 것도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데 어디 함부로 입을 놀려 저주를 하냐며 첫 마디를 했을때에 바로 창을 던지던지 부하를 시켜 그의 입을 막고 목을 베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왕은 어떻게 말하고 있나?
10절 "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꼐서 그에게 다위으 ㄹ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하고"
11절 "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의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에게 쫏겨 다니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어렵게 왕이된 그에게 자신의 아들에게 또 도망을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 것과 그것을 비웃고 저주하는 것이 바로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않은가?

그 악한 사람의 입을 통해 다윗 자신에게 쏟아붇는 저주의 말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명령하셨기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왕으로 등극해서 좋은 나날을 보낼때만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자신을 저주하고 돌을 던지는 이 일도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하심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첫 아들 암놈의 잘못과 압살롬의 잘못을 아버지로써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잘못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오히려 다윗왕을 징계하시고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죄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입을 통해 그를 저주하게 하시고 그의 잘못의 지적하고 계심을 그는 보았던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저주하면서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이 사람이 왜그래?" 하면서 대항하던지 그에 대해 복수로 더 심한 저주의 말과 행동으로 돌려주지는 않는지?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위왕 처럼 혹 우리가 저지른 잘못과 죄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질책하시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며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지는 못하는가?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되려면 다위왕이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 사람에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1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하고"12절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잘못하고 죄지을때 우리를 향해 저주하며 돌을 던지는 사람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게 개입하시고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하시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왕,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통해 그가 가졌던 삶의 원칙과 신앙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않았나 생각이 든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왕이 되는 길은 너무나 길고 힘들며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는  험한 길이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24장 2절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갈새" 다윗이 있는 곳으로 싸움에 능한 군인 삼천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미친짓까지하면서 도망다니며 살던 다윗에게 이런 쫓기는 삶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주시는 일이 벌어졌다.

다윗과 같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며 뒤를 보고 있는 사울왕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24장4절)
그러나 결국 사울왕을 죽이지를 못하고 그의 옷자락 조금을 벤것마저도 마음에 찔려(5절) 괴로워했다.

그는 10절에 사울왕에게 소리높여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자기의 손에 넘기셨으나 12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려하는 사울왕을 자신의 손에 넘기시는 좋은 기회를 주셨고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왕,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실 것이라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손을 델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말은 상황적으로 기회인것 같지만, 사울왕을 죽여야 자신을 왕으로 삼으시고 기름을 부은 하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 같은 기회였지만 이 기회를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고 자신의 손을 들어 사울왕을 죽일 수 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기회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26장에 또 다시 한번 사울왕을 죽이고 다윗 자신이 이제는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었졌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광야로 내려갔을때 저녁때가 되어 모든 사람이 잠들었을때 아니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셨을때 12절"다윗이 사울의 머리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못하고 깨어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이라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더 확실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면 않되는 것이다. 다윗이 이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이 좋은 기회를 만드셨기때문에 어쩌면 사울왕을 죽여도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평생 사울왕을 피해다니고 광야와 굴로 도망다녀야 하는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버리셧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 하나님의 인도이자 섭리라고 확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아비새도 8절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라고 말하고 있지않는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사울왕을 죽인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가 죽인 것이니 자신은 더더욱 떳떳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10-11절에"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자르르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하면서 사울왕이 자고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는 것 같은 상황이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알고 있었다. 이 기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인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는 상황이 또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를 보고, 거기다 분명 명분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면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곤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하나님께서 블레셋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싸워이기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하나님께 묻는 절차도 무시하고 제사도 자신이 드리는 영적 교만을 가지고 직접 행하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결국 겉으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앞에서 놓인 이 좋은 기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대로 왕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함으로 생각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장21절-22절,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페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그리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는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짓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이런 좋은 기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것 이다.

바로 다윗이 그랬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40년간을 쫓아다닐때 도망다니는 신세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비록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그런 삶을 벗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사용하지않고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뤄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주님!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기다리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과 기회를 보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 어리석은 사울왕 같은 사람이 되지않게하여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은 분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마태복음 6장34절 - 개혁개정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내일 걱정은 내일하고 오늘은 오늘의 걱정으로 족하니 내일 일까지 신경 쓰지말아야한다고 이해해왔다.
이전 성경에도 "....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되어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개혁개정에는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한다.

깊이있게 집중해서 읽지않으면 같은 얘기인 것 같으나, 분명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 성경에도 내일 염려하라고 되어있지않고,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번역되어있다.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껏 내일 일에 오늘 염려하지말고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왔으나, 성경은 염려할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때 내일이라는 시간적 개념에 우리의 포커스를 맞추고 이 말씀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 내일 염려는 내일되면 염려해야하는 것처럼, 또 우리는 염려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날그날의 염려만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면서 살라고 하지않는다. 아니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염려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우리가 어찌 염려하면서 살수 있겠는가? 그것도 염려를 하되 그날그날의 염려만하라는 말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이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염려를 하지말라는데에, 또 우리의 염려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떤 것에 염려를 해야하는지의 촛점과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34절 이전 말씀인 33절에 우리가 다 알고 외우는 말씀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나서 바로 34절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세상살이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보시고 염려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그것 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먼저 해야할 일, 바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 즉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는데 걱정하며 염려하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필요한 부분들을 더해주시고,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또 염려할 이유가 없도록 해결해 주신다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일 일의 걱정은 내가, 우리가 아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라는 것이다.내일 이뤄져야할 주님의 뜻과 목적,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할때 그 뜻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상살이의 걱정과 염려가 내일이라는 시간에 맞추어 알아서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염려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늘 이땅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붙들고 고민하면서 살았다면 오늘의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는 이미 해결해 주셨고, 내일 또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되면 그 뜻을 이뤄가며 사는 내일의 삶속에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것을 가지고 염려를 해왔고 내일 일에 대한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도 염려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염려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에 대한 염려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지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6장 32절이전에 보면 25절, "...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일상, 하루하루의 삶속에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에 대해서 30절, 믿음이 적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말라고 설명을 하신뒤, 33절과 34절의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34절에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구하고 이뤄나가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고 살았습니다. 이 땅에 저희를 보내실때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뤄나가는 삶을 살기위해 고민하고 그 뜻대로 살기위해 염려하는 삶을 살지못했습니다. 하루하루 또 그날그날의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과 목적을 온전히 이뤄 나가시기를 염려하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인내의 부족으로 드러난 진실치못한 겸손이 영적인 교만으로 변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

인내의 부족으로 드러난 진실치못한 겸손이 영적인 교만으로 변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왕을 요구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시고 사무엘을 통해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는 준수한 소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다.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9장 6절-7절에 아버지의 암나귀를 잃어버리자 아버지의 말씀대로 찾아다니다가 지쳐있을때 같이갔던 사환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가서 물어보자는 제의를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들이고,  사무엘앞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면서 21절에 자신은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사람이며, 모든 가족중에 가장 미약하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또한, 사무엘이 이스라엘 왕으로 제비를 뽑을때 이미 기름부움을 받았지않았느냐며, 왜 또 제비를 뽑냐며 항의를 할 수 있었지만 10장22절에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있었다. 제비를 뽑아 결국 사울이 왕으로 뽑혔으나 27절에 불량배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구원하겠느냐며 멸시할때도 그는 잠잠하였다고 말한다.

이미 왕으로 뽑힌 후에도 나이 40세가되어 공식적으로 왕으로 추대하기전까지도 11장6절에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겸손해보이는 삶을 살았던 사울왕, 그런데 그 겸손함도 기다림, 인내가 부족하다보니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는 결과까지 가게되었다.

겸손,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겸손이 진정한 겸손인지,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인지를 알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높이는데 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내며 기다리느냐,  인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만일 인내하지 못하는 겸손이라면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지만 영적 교만으로 사울과 같은 인생의 비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른지 이년이 된때에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한 것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많은 병거와 마병을 이끌고 올라오자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던 사울은 8절에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아나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절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7일안에 온다고 했던 시일이 됬는데로 오질않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 도망가는 이스라엘 군대를 보고 겁이 나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리고 만다. 그런데, 10절에 번제를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조금만 더기다렸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번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번제를 사무엘을 통해 드릴 수 있었는데 넘어서지 말아야 선을 넘어버리는 교만에 빠져버렸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번제를 드릴 자격이나 허락도 하지않은 일을 교만하게 자신이 하고만 것이다. 겸손하던 사울이 영적교만을 범하고 만 것이다.

사무엘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도 12절....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고 무책임한 답변을 하고만다. 겸손했던 사울의 대답으로는 전혀 맞지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영적교만에 빠져있는 사울에게 13절,14절에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꾸지르면서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그의 왕권을 다른사람에게 줄것을 얘기한다. 14절,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이제 왕이 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겸손했던 사울에게 너무나 가혹한 말씀을 하고 있다. 겸손했던 사울에게 인내가 없어 영적교만에 빠진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이었길래....

사울의 교만은 이것으로 끝나지않고,  14장19절에,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싸울때 제사장의 제사를 막으며 그만 두라고 저지를 한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하고"
다 끝나가고 있는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다시 중단을 시키는 인내없는 행동으로 이런 또 망령된 영적 교만을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교만이요, 자신을 죽이는 영적 교만인 것이다.

또한, 아말렉을 칠때 모든 생명을 멸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좋은 것을 남겨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움으로 영적교만의 최절정까지 가게된다.(15장21절/12절) 이에 11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세운 것까지도 후회하시는 일이 벌어졌다.

사무엘은 그 겸손하던 사울이 이런 인내없이 행한 영적 교만을 보고 안타까와하며, 17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라고 말을 하고 있다.

겸손했던 사울이 인내의 부족으로 영적교만을 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울의 겸손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겸손이었다. 하나님을 높이기위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위해 인간적인 겸손함이었다. 사울의 사환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위해 제안을 했을때도 사울이 기름을 부을때도, 또 불량배가 멸시을 했을때도 왕으로 추대받을 때도 그는 그가 이루기를 원했던 이스라엘의 왕, 또한 적들을 자신의 손으로 물리치려했고 결국 자신의 기념비를 헤우는 자신을 내세우려했던 겸손이었다.

다시말해 그의 겸손은 목적달성에 촛점이 맞춰져있었다. 그러했기에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인내를 할 수 없엇던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이었다면 자신의 아들의 믿음의 고백인 14장6절 "...여호와의 구원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직접 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함을 알지못하고, 싸움의 승리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가면 이길 것 같아 자신의 손으로라도 제사를 드리고 승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승리를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는 커녕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명령에 불순종하는 겸손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옮기신 것이다.

둘째, 그가 가졌던 겸손은 진실되지 못한 겸손이며, 진실되지 못한 겸손은 즉 영적 교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대적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진정한 겸손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은 바로 인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높이기를 원하는 겸손은 하니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인내한다.
왜냐면 진정한 겸손의 촛점은 하나님을 높이는데 두기때문에 아무리 겸손해보여도 하나님이 높여지지않으면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신의 뜻을 내세울 수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사울과 같은 진실되지못한 겸손은 하나님를 높이는 목적보다는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한데 있었기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서는 영적인 교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가 없으며 인내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주님!, 우리는 남에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를 높이기위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위한 겸손, 아니 작게는 남들의 인정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겸손을 하곤 합니다. 이 잘못된 진실되지 못한 겸손을 버리게 하여주옵시고 진정한 겸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진정한 겸손을 가질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몸소 아버지 하나님를 높이고 뜻을 이루기위해 겸손을 보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7일 수요일

믿음의 행위는 은밀하게할때 갚아주신다.

믿음의 행위는 은밀하게할때 갚아주신다.

마태복음 6장1절-18절에는 구제할때, 기도할때 또 금식할때 어떻게 해야할지를 가르쳐주고 계신다.
구제는 우리의 믿음의 외면적 실천이고 기도는 우리의 믿음의 존재 이유이며 금식은 믿음의 내면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 세가지의 믿음의 행위를 행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과연 어떻게 구제와 기도 또 금식을 해야할지를 말씀하시면서 이 믿음의 행위의 원칙을 1절에서 분명히 알려주신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주님을 위한 것이라며 명분을 내세운다. 주님을 위하고 주님때문에 한다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어쩌면 우리의 의를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고 믿음의 행위를 한 적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을지도... 왜냐면 우리의 죄성은 항상 우리를 잠시도 나두질 않기때문이다.

2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주님을 위함이라하면서 결국 자신의 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주는 상, 그 믿음의 행위를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 인정과 칭찬을 기대했던 바로 자기만족의 상.
결국 주님과 상관없는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했다는 말이다.

분명히 주님은 어떻게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는 방법에 대해 동일하게 같은 방법으로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4절,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하라...
6절,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방법은 바로 "은밀하게" 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믿음의 행위인 구제, 기도와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너무 잘 아시기에 믿음의 행위를 행하고도 헛되지 않도록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면서 3절에 "너는 구제할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어찌 한 몸에 붙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은혜와  감동으로 행한 구제가, 내가 언제 구제를 했지? 하고 모르도록, 또 기억속에서 지워져 생각이 나지않도록 아주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과연 우리는 은밀하게 하고 있는가?

기도도 아예 골방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어떤 기도를 하는지, 왜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도록 은밀하게 하라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다 같이 기도할때 또 대표기도를 할때는 잘하는데 집에서 매일의 삶속에 기도하지않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없다면 혹 자신의 의를 행하는 기도는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금식도 은밀하게 남이 보면 과연 저 사람이 금식을 하고 있는 건가 할 정도록, 아니 금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럼, 왜 주님은 은밀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왜 은밀함을 좋아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주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께 촛점이 맞추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자꾸 사람의 관심과 시선을 의식하고, 우리에게는 주님께 촛점을 마추기보다는 사람에게 촛점이 맞추려는 죄성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주님께 맞춰져 있다면 오로지 주님과 단 둘이 조용히 또 은밀하게 주님 앞에서만 하면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주님께 촛점이 맞춰지기위해 또 믿음의 행위를 주님만이 받으시기위해서는 은밀한 가운데 해야되는 것이다.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가운데서 해야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관심, 시선과 인정을 무시한채 오직 주님께 촛점을 맞추고 집중해서 하는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 바로 은밀한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그때 주님은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 하신다.

4절,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절,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은밀한 가운데서 한 구제,기도와 금식에 대해 상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고 갚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갚다"라는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빌리거나 꾼 것을 도로 돌려주다." 또는 "남에게 진 신세나
품게된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에 상당하게 돌려주다."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또 자꾸 그렇게 하려는 죄성을 물리치고 오직 주님께 집중하여 은밀하게 행함으로 포기하는 것들, 은밀하게 함으로 자기만족상을 받지못하고 홀로 주님앞에서만 행해지는 멋없고 초라해 보여지는 아니 사람들의 눈의 별 의미없어 보여지기까지하는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갚아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은밀하게 주님께만 촛점을 맞추어 행한 믿음의 행위로 인한 신세를 주님께서는 돌려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어찌 복된 말씀인가? 당연히 주님께만 집중해서 해야할 믿음의 행위를 했다고 사람들에게 받지못하고 자신의 자기만족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안쓰러움 마음으로 갚아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다.

주님!, 더이상 사람들의 시선, 관심과 인정을 의식하지말고 은밀한 가운데서 믿음의 행위를 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님께 촛점을 맞추고 집중하여 당연히 해야할 은밀한 가운데서 행하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서 보시고 갚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소의 목에 메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소의 목에 메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이유는?

마태복음 11장28절-30절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일상의 삶속에 지치고 수고하고 무겁게 짐을 진 자들에게 모두 다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신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또, 하나님의 일에 신경쓰고 애를 쓰며 수고하고 지친 모습으로 어깨에 잔뜩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채 쓰러질 정도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라하시면서 우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어찌 평안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인가? 우리의 수고를 아시고 우리를 쉬게하시려고 부르시는 자상하시고 사랑 많은 예수님의 부르심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수고한자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오라 하시면서 그들을 쉬게하시는 방법이 소나 말의 목에 메는 멍에, 곧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 말씀하신다.  짐을 짊어지고 지친 우리에게 여기에 짐을 내려 놓으라 하시면서 짐을 얼른 받아주시고 우리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더 지우시겠다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것도 짐을 지우시는데 어깨에 이미 짐을 지고 있으니 이제는 목에까지 멍에를 메라고 하시지 않는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우리에게 짐을 더 지우시면서 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거기다 좀 쉬었으면 하는 우리에게 목에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시고 계신다. 삶에 지친 우리에게 쉴 시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또 배우라고 하시고 계신다.
목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울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것인가?

문제는 쉼에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쉴줄을 몰라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발생은 우리가 잘못 수고하고, 잘못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지 못한 수고를 하기에, 잘못된 짐을 지고 있기에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쉼을 얻는 것은 그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도 짐을 지고도 하나도 피곤치 아니하고, 또 땀을 흘리며 수고를 해도 피곤치 않고 짐을 짊어져도 무겁게 느껴지지않는 마음의 쉼, 진정한 쉼을 얻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한자들에게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신다. 왜냐면 우리는 엉뚱한 수고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수고를 해야하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하시는 그 목적과 뜻대로 수고하면서 살아야하는데  자신을 위한 수고,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기위해 수고하고 있으니 피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고를 하셨기에 피곤치 않으시고 쉼을 얻고 계셨던 것이다.

또,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왜냐면 우리는 엉뚱한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의 짐, 욕심의 짐, 개인적인 목적과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짐, 남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야하는 짐, 교회에서 거룩하다고, 신앙 좋다고 인정 받아야하는 짐을 짊어져야하기에 우리는 피곤하고, 지치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짐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는 무엇인가?
소나 말에 목에 짊어지게하여 제 멋대로 행동하지않고 통제를 받으며 주인의 이러저리 밭을 갈기위해 이끄는대로 따라 가게끔하는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인 것이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도 십자가상의 죽음이 무섭고 떨리고 싫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 오신 목적 바로 십자가상의 죽음, 구속 사업을 이루기위해 벗을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목에 메게하신 멍에을 메시고 순종하셨다.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 멍에를 짊어 지신 것이다. 이 멍에를 바로 우리에게 짊어 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이뤄야할 멍에, 바로 삶의 존재를 가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의 쉼을, 영혼의 쉼을,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멍에는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고와 짐은 쉽고 가볍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수고한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신것은 예수님께 배우는 수고는 쉽기 때문인 것이다. 쉽기 때문에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다. 만일 어렵다면 쉼이 되겠는가?

또한, 짐을 진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짐이 무거우면 쉼이 되겠는가?
그렇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수고가 쉽고 예수님이 짊어지신 멍에가 가벼우니 당연히 피곤하지않고, 지치지않고, 힘들지 않는 것이다. 바로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다.

삶에 지쳐있는가? 피곤하고 지쳐있는가? 낙심이되고 다 내려놓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에 수고하고 무슨 짐을 짊어 지고있는지를 다시 확인 해봐야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쉬게하신다고 하신다.
진정한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만 한다.

주님! 우리는 엉뚱한 수고와 엉뚱한 짐을 짊어지고 힘들어하고 무거워해왔습니다.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게하시어, 다시는 힘들다고, 너무 무겁다고, 지쳐 쓰러진다고 하지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지신 멍에,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 나가는 수고와 짐을 지게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쉽고도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영혼 깊은 진정한 쉼을 얻게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쉼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많았던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많이 들어왔다. (눅15:11-32)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아들 바로 탕자. 탕자의 뜻은 방탕하게 사는 사람을 뜻하며,그리고 방탕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음"으로 정확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지못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왜 살아야하는 알지못한채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둘째아들이 탕자라고 알고있지만 진정 깊이 들어가보면, 두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탕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얘기할때 둘째 아들은 돌아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때 정작 내색은 하지않았지만 큰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그의 속 마음은 우리가 잃지 못하고 있다.

큰 아들은 마치 아버지를 생각하는 착한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게 보이지만, 눅15: 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 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니 아버지의 전 재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아들이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을때 정말 큰 아들이 유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둘째 아들인 동생을 나무라면서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런 불효자식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크게 흥분하면서 끼어 들었어야 한다. 왜냐면 맏 아들은 성질이 급한고 화를 잘내는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기때문이다.

어떻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느냐면,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는 화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온 동생이 얼른 보고 싶을 텐데도 너무 반갑고 좋을 텐데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얼마나 화가났으면 안으로 들어가지않고 버티다가 아버지가 나와서 권할때까지 분해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따지고 든다. 29절-30절.

그런데 그는, 동생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옆에서 듣고만 있고 아무말이 없었다.

어쩌면 항상 아버지의 재산에 마음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가 생각에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나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철없는 동생이 유산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지않는가? 말도 않되는 소리이지만 둘째가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데 과연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하며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혹시 유산을 미리 주지는 않을까?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 유산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무 얘기도 하지않은 자기에도 말이다.
12절 "각각 나눠주었더니"라는 말을 우리는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큰 아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는데 아버지는 각각 큰 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신 것이다.
우리는 둘째 아들만 유산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큰 아들도 유산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 각각 나눠주었다고.
큰 아들은 단지 그것을 탕진하지 않고 주신 재산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펄쩍 뛰면서 그러시면 않된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않받겠다고 해야하는 하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대로 받은 것이다.
그럼, 둘째아들과 뭐가 다른가? 둘째는 그것을 현찰화시켜 돈으로 가지고 먼 나라로 간 것이다.
13절, "그 후 며칠이 않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몇일 만에 아버지께서 주신 유산을 현찰로 만들어 간 것을  볼때 아마도 큰 형이 바꾸어 주지않았나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항상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기때문에 소, 양, 염소, 집등등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의 몫으로 준 유산을 헐 값에 동생에게 사고 돈으로 바꿔주었을 것이다.

또 큰 형이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둘째가 돌아왔는데 자기의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중에 살진 송아지를 그 동생을 위해 잡아준 것이 너무 화가난 것이다. 동생의 생명이 살진 송아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온통 아버지의 재산에 집중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간섭과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떠나 자유롭게 혼자 자기 인생을 살아보기를 원하고 혼자서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둘째 아들이 가졌던 관심을 위해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나니 결국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없음을 때단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자기를 안아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는 아버지를 보고 다시금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되었고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함께하심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함께하심의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와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갖고있는 재산에 관심이 있어 정말 아버지와 함께하는 은혜를 모른채 바로 방탕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들떠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지 어떤 은혜인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말에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보다는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바로 알면 아버지가 가진 것이 다 아들의 것으로,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아버지와의 관계, 함께 거함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 관심이 쏠려있는 큰 아들을 깨우쳐주신다.
또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 혼자 살려고 했으나
결국 아버지와 함께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것을 깨다고 돌아왔음을 아버지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쩌면 큰 아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버지랑 함께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심의 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에, 교회에 직분이 있다는 것에, 교회에서 거룩해 보여지는 것에, 아니 하나님이 주실 복에 관심이 있고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탕자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신앙의 삶이 근본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함께함으로 오는 것에 대한 관심, 교회생활로 얻어지는 것들, 교회의 직분을 가짐으로 받게되는 것에, 교회 봉사를 함으로 인정받게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안에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바로 탕자인 것이다.

주님, 우리가 탕자였습니다.  교회안에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과 함께하심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품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아버지의 품과 함께하심의 은혜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깨닫지 못하고 알고만 있었던 것때문에 망한 삼손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신을 위해 쓰다가 결국 망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손에 대해 우리는 잘안다.
사사기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삼손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알다" 또는 "알려주어 알게하다"와 "알지 못하다"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온다.
13:16 ...그가 여호와의 사지인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3:26...그제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14:4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6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14:9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니 아니하였더라, 14:16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알려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하리요..., 14:17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주매.... 알려주었더라, 16: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삼손의 부모도 삼손을 택하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삼손도 자신의 비밀을 알면서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큰 힘이요 능력인줄 생각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맨손으로 사자를 찟었던 일도 부모에게도알리지않았고, 그 후로도 2번 더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큰 힘을 낸 일도, 또 자기의 아내에게도 수수께끼의 답을 알리지않다가 결국 알게하여 아내를 빼아기게 되고, 자신의 힘의 비밀도 결국 들릴라에게 알게하여줌으로 두 눈이 뽑히고 망하게되는 삶을 살게된다.

그는 자신가 알고 있는 비밀이 힘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힘이 아닌 것을 마지막 죽기전에야 깨닫게된다.
자신의 힘의 원천이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않는데서 오는 줄알았지만, 16:20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들릴라에게 머리가 밀린후 힘을 쓰려고 했지만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게 되었던 사실을 알지못했다고 하지않고 여기서는 깨닫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삼손이 여지껏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머리로 일어나는 사실을 안 것이었지 그 사실뒤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넘어 깨닫는데 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실인으로 택하신 것은 알았지만 왜, 무엇을 위해 택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구원의 예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 내삶 속에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비밀은 절대로 우리에게 힘이 또 능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삼손처럼 아는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망하게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지못하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살다가 결국 깨닫지 못했기에 삶을 망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 다고 능력의 삶을 살수 있는가?
깨닫는 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안다는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 마음으로 알게되어 그 뜻을 이해하고 내 삶의 일부가 되어지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않는다. 삶에 나타나지않는다. 깨달을때에야 행동으로 또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깨달을 때에 힘이 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단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 않은 사실을 안다는 것으로, 남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을뿐 그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고 왜, 또 무엇을 위해 오는지를 알지 못했던 삼손,
우리는 제 2의 삼손이 아닐까?

주님, 주님을 알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알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라하여 내 삶속에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이유를, 그분의 뜻과 목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알고 내 삶 깊이 깨달아져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나고 또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8월 2일 화요일

하나님은 왜 불평할 만한 조건과 환경을 우리에게 남겨 두시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못했다?

여호수아가 죽기전에 사생결단을 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한다(여호수아24:15).
여호와를 택할지 아니면 우상을 택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여호수아의 강경한 입장에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대답을 한다(여호수아24:15).

드디어 여호수아가 죽고난 후 사사시대가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제비뽑아 얻은 땅을 각 지파별로 차지하라하신다.

사사기 1장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까"하고 묻자 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이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하시어 유다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을 치고(4절), 예루살렘과 헤브론까지 쳐서 땅을 차지하였다.(8절-9절)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가나안 족속들을 넘겨주시어 다른 지파들도 그들을 쳐서 진멸케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겨주신 가나안 족속들을 전부 진멸하지못하고 19절,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1절,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9절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31절에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1장에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여덟번이 나올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신 가나안 족속을 전부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게되고 하나님을 떠나는 죄악에 빠지게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않고 가나안족속을 다 진멸하지않고 쫓아내지 않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사사기1장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22절에도 요셉의 가문에게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분명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셨다.

그러나, 19절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 철 병거가 있어 그들을 진멸하지못하고 쫓아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믿음이 없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계서 쫓아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정말 상반되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않는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이 직접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게 섭리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고 남겨두면 분명히 그들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것을 아시기에 진멸하고 다 쫓아내라고 명령까지 하셨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2장23절에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3장2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하나님은 분명히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말고 놀라지말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함께하심과 가나안 족속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전부 다 붙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손에 모두 넘겨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또 우리가 하나님보다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버리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남겨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다른 이목꺼리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에서 멀리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믿음이 연약하여 죄에 빠질 수 있는 환경들을 나두신다는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시면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주의 사랑으로 형제를 무조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2장 22절에,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3장 2절,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하셨더라"

그 이유는, 다 쫓아내지 않고 남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는지 아니 섬기느지 시험하려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다른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죄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조건이 있음에도 죄에 빠지지않나 보시려고 하신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가 되는지를 보려고 하시는 것이며, 주의 사랑으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음에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믿음이 있고, 말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는지,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행동이 없는 능력없는 믿음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마음으로, 진실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며, 온전한 믿음을 갖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처해있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탓한다. 우리는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조건과 나쁜 환경을 탓하기전에,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왜?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섭리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두신 환경과 조건 넘어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볼수 있어야 한다.

주님, 주위의 환경을 보게 하지마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하여 주옵소서.
주위의 조건과 환경에 집중하지않게 하시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인가?

누가복음 9장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다, 예수님을 따른다, 예수님을 믿는다, 또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고까지 한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누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란, 다른 말로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이라고 전제하시며 조건을 말씀하신다.
 1)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그 시간 만큼은 자신을 부인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임을 철저하게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의 죄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리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
- 이재훈이는 더이상 없다 내 삶에 오직 주님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 삶에 내가 있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과 목적만이 내 삶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재훈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벌래만도 못한 인간인 것이다. 우리가 뭔가 가졌다고? 권한, 권력, 지위가 있다고? 우리는 아무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에 의해, 주님을 위해 존재 한다고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이재훈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주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 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내가 뭘 잘했다고, 내가 뭘 잘한다고,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우리가 교회를 위해 무었을 했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가? 아무리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큰 일을 했다할 지라도 당연한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로 한 것뿐이며, 우리는 아무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가? 우리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우리의 생각과, 얼굴과 말과 행동과 그리고 마음과 더 깊은 우리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 없는가 말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마음대로 말할 수 없으며, 우리 마음대로 얼굴을 붉힐 수 도 없으며, 우리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의 생각을 통해, 우리의 입을 통해, 우리의 얼굴과 행동을 통해 또 우리의 마음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를 부인하는 말과 행동인지 자신에게 물어봐야할 것이다.
만약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니라며 우리는 감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그럼,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를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얼굴, 생각, 입술, 행동, 마음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또 두번째의 조건으로,
2)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지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또, 왜 그냥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시지 않고 "날마다"라는 형용사를 붙이셨을까?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더중요한 것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가 이다.
날마다라고 하신 이유는,
- 십자가를 지는 유효기간이 단 하루이기때문이다. 오늘 내 십자가를 지었다고 일주일 쉬고 십자가를 않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오늘 진 우리의 십자가의 효력은 오늘로써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반복되어져야 하기에 날마다 져야한다. 이미 진 십자가 또 질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몇번이고 진 십자가인데 하며 십자가를 지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날다마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습관이 되야 하기에, (반복학습은 습관을 만든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 같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날마다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져야하는 것이다.
30년 십자가를 졌는데 하며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을때까지 따라간다면 우리는 죽을때까지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각자가 지어야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 좋던 싫던 내가 지어야할 십자가이다, 현 상황, 현재 원하던 원하지않던 감당해야할 십자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잔을 지나가게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실때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그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아니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좋던 싫던 지셔야했던 십자가였으며, 그 십자가를 지셨다.

- 내가 태어나고, 살아야 할 목적을 주는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목적,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즉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태어나시고 살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 하나님이 내 삶에 주신 뜻을 이루기위한 필수적인 고통의 십자가./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주님의 외침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감당해야한 고통의 십자가처럼, 우리가 이땅에 보내심을 받고 살아가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감당해야할 고통과 어려움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주님,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부인해야하며 날마다 내 십자가를 져야함을 압니다.
그래도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갈 힘을 주옵시고, 주님의 강한 팔로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고 짊어지신 십자가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때 성벽 위의 라합의 집은?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리고성을 6일간 하루에 한번씩, 그리고 7일째에는 7번을 돌고 나팔과 큰소리를 지르자 여리고성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이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되는 큰 은혜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넘쳤다

여호수아 6:20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물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때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성을 점령하고"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여호수아6:2)하셨는데 왜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함락하게하셨을까?
바로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미리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고 그안에 사람들을 칼로 치시고 더 쉽게 여리고성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왜 성벽을 무너뜨리셨어야 할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떤 방법이던지 여리고성을 함락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 도 있다.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여리고성을 함락하는 것이었기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방법이라도 그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라합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선택이었지않았을까? 라합의 온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벽위해 살고있던것을 아시면서 일부러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여호수아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위에 거주하였음이라"

2명의 정탐군을 구해주고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있던 라합에게 이 성벽 위에 집에 있어 붉은 줄을 매달고 있으면 살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으신 것이다.
그가 믿고 있던 성벽위에 집과 붉은 줄, 바로 성벽위에 집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정탐군을 성벽으로 도망보낼 수 있었고, 성벽에 붉은 줄을 내려 이스라엘백성이 침략하러올때 보이도록 할 수 있었던 정말 좋은 위치, 성벽 위의 집을 굳게 믿고 있었다.
라합은 정말 이 성벽위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라도 하면서 바로 이 성벽위의 집에 살았기에 살 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성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성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소리에 얼마나 무서웠고 두려웠겠는가?
바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함락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한 방법 곧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시작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아니 오히려 성벽위에 집이 아니라 성안의 집에 살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을 하면서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하필 왜 성벽을 무너뜨리며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오냐며 이제까지 성벽위에 집에 거주함으로 살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접고 옆에서 무너져내리는 성벽을 보며 눈을 감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이제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할때, 굳게 믿고 있었던 성벽이 무너져 내릴때 하나님은 역사를 하고 계셨다.
라합과 그의 온 가족을 살리시기위해 모든 성벽은 무너뜨리되, 라합이 살고있는 성벽위의 집, 그 집을 떠 받치고있는 성벽은 무너뜨리지 않으신것이다.
상상을 해보면 양 옆 온주위의 성벽이 무너져내리는데 라합이 살고 있는 성벽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얼마나 기적같은 일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이신가? 단지 성벽위에 집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오직 라합이 있는 성벽만을 무너뜨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직접 보호하셔서 살수 있었음을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구원하시기위해 온 성벽이 무너지지만 라합의 성벽만을 무너뜨리지 않고 보전하신다는 것을 라합으로 보게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붙들고 있는 것 때문에 살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붙들고 있는 그 자체가 아닌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신앙, 생각, 주장, 믿음때문에 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때문에 사는 것을 잊은채 그 신앙, 믿음, 주장을 붙들고 있기에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그가운데, 이방인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위해 온 성벽을 무너뜨리는 가운데 그가 살고 있는 그 성벽을 보호하신 것이다.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제는 죽었구나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 이곳이 다 무너져 내리는데 우리는 죽는구나 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무너져내리는 성벽가운데에서고 우리의 성벽만큼은 붙들고 계신것이다.

라합을 살리시기위해 살아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게 하시기위해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주님, 우리 주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다들 죽는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있는 곳, 이곳 만큼은 직접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함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크로스비 - 찬송가작시자

크로스비는 의사의 실수로 생후 6개월만에 맹인이 되고 말았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하며 인사해 주었다.

그녀는 8,000여편에 이르는 찬송가를 작시했는데, 무릎을 꿇지 않고는 단 하나의 찬송가도 쓰지 않았다. 우리 찬송가에도 그녀의 것이 20여편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391편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는 매우 아름다운 시로 유명하다.

어느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왜 하나님꼐서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셨는지 안타깝기만 하군요", "만일 제가 이 땅에 태어났을때 한가지 간구할 수 있었다면, 저는 제가 장님이 되게 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제가 하늘 나라에 갔을때 맨 처음 보는 분이 주님이실테니까요"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신앙인은 불운을 불평하기 않고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11:1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데....

에스겔 11장 18절-21절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한 마음이 되려고, 마음을 같이 하려고 해도 않된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한 마음을 갖기가 쉽지가 않다. 왜 그렇까?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아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한 마음과 새영을 주셔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한 마음(히브리어로 "레브 에하드") 또는 일치하는 마음을 주시기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이 다 다르고 의견이 틀린데 무엇을 기준으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미 굳어져 딱딱해진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부드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불가능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마음을 주신다면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 마음 속에 돌 같이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주시는 하나님의 한 마음을 갖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마음을 주시며 또한 새 영을 주셔서 돌 같이 딱딱해진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한 마음을 가지는 길은 하나님이 주실때에만이 가능한 것이며 그 한 마음과 새 영을 가질때만이, 하나님이 중심이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 하나님께 속한 새 영, 하나님의 영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우리가 애써 부드럽게 하려고 해보지만 결국 조금을 못버티고 다시 굳은 마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한 마음을 가지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과 새 영, 하나님의 영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중심의 한 마음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속한 새 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 이 한 마음과 새영을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며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18절과 21절에 분명히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운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속에 있는 하나님 보다는 앞세우고 중요시하는 우리의 의, 주장, 생각, 판단, 자존심, 명분, 법, 상식, 타당성등을 제거해야한다. 인간적인 모든 방법, 목적을 이루기위한 모든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생각과 가증한 것을 제거해야지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나님편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일까? 내면 깊이 들어가보고 정말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든 생각, 하나님이 가증하다고 말씀하시는 모든 방법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한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제거해야만이 하나님께서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인 것이다.
한 마음이된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이 한 마음가 새영을 받은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20절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다시 한번 21절에 단호하게 하나님은 미운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을 하고 계신다.
정말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의 방법으로 생각으로 한 마음을 달라고 요구했던 어리석었던 저희를 용서하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해 하시는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한 마음과 새 영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고 놓지않는 것들, 우상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생각과 방법들을 제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모든 것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 삼으시는 한 마음을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고 한 마음과 새영을 주시기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