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6일 월요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8:22-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사건이다.
이 에피소드는 마태가 마8:23-27, 마가가 막4:35-41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 사건을 겪었던 제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시각에서 이 사건에 대해 각각 기록을 하고있는데 마태, 마가와 누가 세 제자가 동일하게 기록하고있는 내용은 배에 오르신 예수님이 잠이 드셨다는 것,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 죽게되어 예수님을 깨웠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하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중하셨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혼을 내시고 있는 부분을 세 제자가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시니
8: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후, 제자들에게 무서웠지? 내가 잠을 자느라 몰랐다며 미안해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혼을 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왜 바람과 풍랑에 무서워하여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자들에게 이렇게까지 믿음이 없다고 하셨을까?
바람과 풍랑앞에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죽게까지되자 두려움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함 제자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데 무엇이 그렇게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예수님은 책망하고 하고 있는 것인가?

제자들이 잠을 곤히 자고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주무셔서 짜증이 나셔서 그렇게 반응을 하셨을까?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그럼, 예수님의 눈에 무엇이 그렇게 믿음없는 행동이었단 말인가?

예수님의 눈에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던  이유는 3가지로 볼 수 있다.

1) 예수님께서 목적지를 정해주셨다.
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4: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가자고 하시며 행선지를 정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곳이 있으셨고 그 곳으로 예수님께서 가자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그 어떤 바람과 풍랑이 막을 수 있겠는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바람과 풍랑을 창조하신 분이 가시는 길을 누가 또 무엇이 막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당연한 사실 제자들이 믿지 못했기에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가 가야할 길과 목적지를 정해주셨는데 그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하며 혹 목적지에 갈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고 계셨다.
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목적지를 정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과 동행을 하고계셨다.
예수님께서 목적지만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타고 계셨음에도 불고하고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4: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예수님이 정하신 행선지를 가던 사람들과 배는 제자들과 예수님만이 아니었다.
다른 배도 같이 항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시질 않으셨나 제자들이 있던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동행하지않는 다른 배들에 탄 사람들처럼 똑같이 무서워하며 두려워했기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함께하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동행하지않는 사람들의 삶처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고 계셨다.
8: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4:38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베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 지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항해하는 내내 그 흔들이는 배에서 편히 베개까지 베시고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많이 피곤하셔셔? 아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을 믿고 있었기때문이었다.

분명 예수님께서 행선지를 정해주시고 또 그 행선에 함께 하시고 계심을 제자들이 알고 있기에 그렇게까지 믿음없이 무서워하며 두려움에 떨지않을 것을 믿고 계셨고 바라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믿음없이 행동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믿고 계신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바램에 반응하지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우리의 삶에 1인칭 주어는?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문장들 속의 주어는 1인칭 대명사를 예수님이 사용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내가 길이요 생명이니", "나는 선한 목자라"등 예수님께서 말씀하실때 주격 1인칭 대명사로 사용되었고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소개할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 소개하며 3인칭 대명사를 사용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에서 표현되어지는 나 자신은 1인칭 주어가 아닌 3인칭 대명사어어야 한다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꾸 자신을 들어내려고 주어를 1인칭으로 사용을 하는가?
그래서 많은 사역과 봉사를 하고나서도 주어를 자신인 1인칭으로 사용하는 교만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주어는 나 자신인 아닌 유일한 주어이신 예수님이셔야한다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3인칭으로써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1인칭 주어는 오직 예수님만 사용되어져야한다
그렇기에 성경에 1인칭 주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이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마르다는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은 했으나 믿음없는 고백이었다.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뒤에 나타난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오라비가 죽지 않니하였겠나이다”(22)라며 불평스런 고백을 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않는다”(25,26) 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다가 고백을 하고 있다.

얼핏보면 믿음의 고백같아 보인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한 것과 동일한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다의 고백은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과 달리 헬라어 원어를 자세하 관찰해보면 믿음없는 고백임을 알 수 있다.

한글 성경에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동사인 믿다가 현재형으로 되어있으나 원어에는 믿었었나이다(πεπίστευκα)인 현재완료형이다.
즉 이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으나 오늘 내 오라비가 죽게 내버려둔 예수님을 보니 더이상 믿지못한다는 얘기인 것이다.

전후내용을 보면 그녀의 고백이 믿음없는 고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을 부를때, 주께서(21,22), 주여(27)라고 했으나, 이 고백을 하고 난뒤 동생 마르다를 부르러 가서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하니”(28)라며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그렇다,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죽지않도록 아무것 하못한 예수님은 그녀에게 더 이상 주님이기보다는 친구이자 선생님이셨던 것이다.

, 마르다는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31) 마르다와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집에가서 더이상 그녀에게 주님이 아니며 능력없고 힘없는 예수님이 오셨음을 숨기려 가만히”(28) 마르다에게 전한다.
원어는 비밀리, 조용히(λάθρᾳ)라는 뜻으로 분명히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않았기에 마리아에게만 비밀스럽게 또 조용히 예수님이 오셨음을 얘기한다.
그래서 같이 있던 문상객들이 “….그가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31) 곡하러 나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다는 결국 자신의 삶의 형통함과 평안이 있을때는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믿어졌었으나 막상 오라비가 병으로 죽게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질 못하자 더이상 예수님은 그녀에게 주님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믿음없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평안과 복을 누리고 만사가 형통할때에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이나 닥친 상황의 형에 관계없이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눈물을 흘리시더라”(33,34) 친구인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이들을 보고 동정심에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라 이들의 믿음 없음과 무엇을 믿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모르는 어리석음에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고 계신데도 그것을 모르고 믿지 않는 그들의 우매함에 심령에 비통해하셨던 것이다.

진정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면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과 모든 환경과 상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해야할 것이다.   

2013년 6월 30일 일요일

우리는 적극적인 수동태적 삶을 살아야한다


성경 신구약의 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에는 한글이나 스페인어 또는 영어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동사 능동태와 수동테를 중요시한다. 왜 현대인의 언어와 달리 당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는 동사의 상태를 말할때 능동태와 수동태로 나누어 큰 의미를 부여했는가?

주관적인 생각일지는 모르나 깨닫게 해주시는 마음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능동태의 입장에서 말씀하시고 또 명령하시며그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그의 백성들은 수동태의 입장에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능통태적 명령에 수동태적 순종으로 본토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으며, 예수님도 능동태적으로 양의 문이시라하면서 수동태적으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동태적인 말씀에 항상 적극적인 수동태적 순종을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능동태적으로 행동할때 교만이 생기고 우리가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동태적 명령에 적극적인 수동태적 순종을 바라시는 것이다.
능동태는 수동태를 부르고 수동태는 능동태에 의해서 반응하게 되어있기때문이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참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한다.

참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지속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게 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끝맺는다. 우리의 기도는 절박한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보여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따르는 것이다. - 개혁개정, 굿데이 성경에서 -

2013년 4월 21일 일요일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

9 57-62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으나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 못했던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이유는 그들의 따르려했던 동기가 불순했기때문이다.

1) 인정을 받기위해 따르려했던 사람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자 그만 따르는 것을 포기한다.

예수님을 따르면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높여주고 예수님의제자로써의 자리도 얻고 대접도 받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머리둘 곳도 없다고 하시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 인생에 별 소득이 없음을 보고 포기한다.

예수님을 따르면 남보다 나서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손해요 십자가의 길이요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좁은 길이란 것을 알게되면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2) 삶의 우선권이 예수님이 아니었던 사람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가 먼저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을 해달라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대답하신다.

그렇다 그 어떤 세상의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보다 우선일 수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도 그의 삶에 우선이된 가족을 세상을 놓칠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 가질 못한다.


3) 두 마음을 품은 사람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먼저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두마음 품고는 절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
세상에 마음이 묶여서는 자꾸 뒤돌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다하지않다.
예수님을 따르기위해서는 과감히 세상의 것들을 놓아야만 한다.
결국 이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