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일 목요일

마태복음 2장 -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

2장에서는 우리가 잘아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날을 기념하여 Dia de reyes 공휴일로 지킨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려 예수님 탄생후 이들과 같은 선물과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없어 많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동방박사들때문에 비극이 생기고 만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고 예수님 가족이 야밤도주를 해야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본문1절과 2절에 보면 예수님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왕에게 가서 유대인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묻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헤롯왕에게 가서 예수님이 어디서 나셨는지를 물음으로 해서 두 가지의 비극이 일어난다.

 첫째는, 16절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네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두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에게만 가서 묻지만 않했어도 그 많은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직 왕에게 가서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유대왕이 났는데 어디있냐고 묻는 것은 무엇인지? 박사들이란 사람들이 그정도의 생각도 없었는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두째는, 13절,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안그래도 마구간에서 힘들게 태어나신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가 물은 것 때문에 밤에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 드린 황금, 유황과 몰야기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야밤 도주하는 처지에...

가만히만 있으면 예수님의 별이 알아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인도를 할텐데 9절에 보면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또 2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처음부터 예수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까지 인도를 했는데 왜 헤롯왕을 찾아가 그 비극을 유발시켰는지 이해가 않가지 않는가?
헤롯왕에게 얻은 정보는 기껏해야 베들레헴이라는 것 밖에, 베들레헴을 몰랐어도 결국에는 별이 알아서 찾아 주었을텐데....

그들의 잘못은 별을 보고 왔던 그들이 별이 없어지자 별을 보내신 하나님을 찾지않고 헤롯왕을 찾은 것이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이 상황이 바뀌고 어렵게되자 그 상황을 주장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권자를 찾고 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 죄인 인 것이다.

"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은나 사람의 일은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29:26

그 어처구니 없는 동방박사들의 실수 아니 믿음없는 행동이 큰 재앙을 낳게했다.
깊이 묵상을 하다가 그 동방 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별을 보고 먼 동방에서 부터 온 박사들이 갑작기 예루살렘에 들어서자 별이 잠시 없어졌던지 아니면 머춰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별이 이동을 하기를 기다리마 전혀 미동도 없자 생각하기를 자신들에게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남이 경배할 만큼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 먼 동방에서 온 것 같이 이방인인 헤롯왕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고 헤롯왕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 많은 아이들이 죽지도,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나 하나님은 이런 희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 있으셨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로 원하셨던, 뜻하셨던 일이 있으셨다.
첫째는,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리는이방인 분봉왕인 헤롯에게 온전하시고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3절) 그리고, 대제세장들과 서기관(4절)들에게,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기다리던 주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1장11절 말씀과 같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았고 이미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내 아이의 죽음을 17절,18절에 이에 예레미야의 말씀하신바(렘31장15절)....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애굽으로 도망가는 예수님의 가족은 15절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동방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 별을 멈추시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던 헤롯왕이 그리 하실 것 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12절,13절에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전한 뜻을 모르는 인간들의 죄와 잘못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것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도 그러나 결국 그 것을 피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또 우리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과의 벌어지는 모든 사건속에서 주님의 뜻에 우리의 행동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 하나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케 하시고 주님의 뜻에 집중하여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마태복음 1장 - 거꾸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족보, 나의 족보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며 시작한 후 2절부터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낳고...낳고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낳고...낳고....낳고해서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아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 것 같이 생각되어지는데,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는 오히려 반대 아니 거꾸로라고 깨닫게 되었다.
아브라함, 이삭...유다...다윗...요셉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기 위해 거꾸로 요셉과 다윗과 유다, 이삭, 아브라함을 사용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내 족보를 보면 이항복시조의 15대손 경주이씨로써 이재훈이 태어난 게 아니라, 나 이재훈을 하나님께서 이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하신 것이고, 나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내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용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것이 억지같이 들릴질 모르나,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나를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디자인하셔서 1969년 6월5일에 태어나게 하시고 오늘 2010년6월5일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게 집중이 되어있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버지의 대에서도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내 아버지를 탄생케하시여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준비하시고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족보나 내족보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요한가? 아니면 아브라함이 중요한가? 누가 주인공인가?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공이기에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의 사랑과 나를 향한 계획이 여기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족보에는 각각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당연히 예수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이자 삶의 목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에 그의 삶이 드러나듯이, 다윗의 이름에 그의 삶의 목적이 나타나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21절에 보면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그의 삶의 목적과 그의 삶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해야할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대로 사셨고 그 삶의 목적대로 사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름대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대로 삶의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재훈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삶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제 이름의 족보를 주시고 제게 관심을 가지시고 제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제 이름에 합당한 삶을 주님의 뜻에 맡게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요한복음21장-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와라

ㅅ21장을 읽다가, 이미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준비해 두신 예수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이유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깨달음을 달라 기도하며 묵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깊은 깨달음을 주셨다.

21장은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려 나타나셨다.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간다며 디베라 바다로 갈때 여러 제자들이 따라갔다. 밤새 고기를 못잡고 새벽이 되었을때 주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고 말씀대로 하였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신줄 알고 바다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쳐 육지로 나온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미리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으로 조반을 준비해 두셨다. 그런데 이미 어디선가 준비해 두신 생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셨다.
왜 방금 잡은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을까? 준비한 생선이 모자라서? 예수님이 사람 수 계산을 잘 못 하셨으므로? ...아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하시며 베드로에게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당부를 하시기 위해서다.
주목해서 봐야할 단어는 먹으라, 먹은후, 먹이라는 동사 먹다이다. 21장에 4번이 나오는데 모두 전단락을 연결하며 마지막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앞절에 사용된 단어이다.

첫번째, 먹다는 1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미리 준비해 두신 조반을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다. 이미 생선은 준비해 두셨기때문에 구지 지금 잡은 생선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한마리씩 세어보고 총 153마리인 것을 확인후  몇 마리를 가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영문도 모른채 조반을 먹었을 것이다.

두번째, 먹다는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조반을 준비해 두셨을까?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드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구운 생선을 먹여 주시기 위해?
분명히 깊은 뜻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그의 앞으로의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예수님의 당부를 하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가 필요하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육의 효과와 이해력을 돕기위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 내용과 관계되는 일로써 조반을 준비하신 것이다.

세번째, 먹다는 15절, 17절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하신 후 그리고, 조반 먹은 후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맡기고 갈 양들을 양육하고, 지키고,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기억에 남게 그의 삶에 강하게 새길까 생각하시며, 예수님께서 직접 생선을 잡아 구워주시며 제자들을 먹이우신 것 같이 예수님을 통해 얻은 그 많은 고기를 가지고 맡기신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 본인들의 일상으로 돌아와 고기를 잡겠다는 그들에게 그 고기를 준비해 두시고 먹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영혼, 양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얻은 수 많은 고기를 가지고 그 양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워주고 먹이라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비유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나 우리는 그분의 양을 먹여야 한다. 무엇으로 먹여야 하나? 예수님을 통해 얻은 것으로 예수님이 먹이게 하신 방법으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고기가 아닌, 우리가 밤새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수고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얻은 고기로 우리는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미리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으로 양들을 있는 곳에서, 양들의 일터에서, 양들의 일상에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이제껏 제게 맡겨주신 양들을 제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먹이려 했던 제 중심적이었던 모습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을 통해 얻어지는 주님의 것으로 먹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서서, 주님 중심의 삶, 주님 닮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