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5일 월요일

창39:3 요셉의 삶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prosperidad)"함

하나님이 성경에서 한 인생에게 형통함 주시었다고 거듭(39:2,3) 거듭(39:23) 말씀하신 인생이 바로 우리가 잘아는 요셉이다. 그의 삶은 형통한 삶이었다. 아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한 삶을 살았다. 왜냐면 요셉은 인간의 눈으로,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형통한 삶을 산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때문에 그의 삶은 진정 형통치 못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린 17세의 나이로 하나님이 주신 꿈때문에 안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형들에게 미움을(37:4) 받고 있었는데 이 꿈때문에 더욱 미움을 받게(37:5)되었다. 그 미움이 형들에게 그를 죽이고자하는(37:18) 마음까지 갖게했고 결국 구덩이 던져지(37:24)게 된다. 그리곤 미다안 사람 상인들에게 팔려 아버지와 가족을 등지고 형들에게 팔여 애굽으로 가게된다(37:38).  애굽에 도착한 요셉은 다시 한번 더 보디발에게 팔리게(37:36)되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대가로 옥에 갇히게 된다(39:20). 11년이 지난 28세의 나이에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풀려나도록 도와줄 것을 약속을 받았으나 2년간 요셉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아예 그를 잊었더라고(40:23) 성경은 그의 삶에 대해 저술하고 있다.

이 어찌 형통한 삶인가? 형통하다는 말의 뜻은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감"이라고 사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 원하고 뜻한바대로 모든 일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풀려간다는 얘기인데 요셉의 삶을 보면 정 반대의 삶인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은 요셉의 뜻대로 원하는대로 모든 일들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무엇이 어떤 삶이 하나님이 주신는 형통함인가?

첫째 형통함은 자신관점에 맞혀있지않고 하나님의 관점에 맞혀있다는 사실이다. 요셉의 삶을 보면 그의 삶은 고통과 외로움과 아픔이 많았지 형통함이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었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꿈때문에 더욱 미워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이엇으며,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이 형통함이 아니라 구덩이 빠지고, 팔리고, 또 팔려 결국 옥에 갇히고 술 관원장이 요셉에 대해 기억을 못하고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형통함인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 맞혀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며, 요셉에게 향하신 뜻과 목적은 세번째 이유에서 언급한다.

둘째로 형통함이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형통함이다.  39장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3절에도 "함께하심을 보며...형통하게 하심을...", 21절,22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본문에 형통을 얘기할때 꼭 여호와가 함께 하셨다라고 말씀한다. 형통함은 하나님이 함께하실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형들이 미워했지만 꿈을 꾸게하셔서 더욱 형들로 미움을 받게되는 것이 함께하심의 형통함이며, 죽임을 당할 상황에서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함께하심의 형통함이고, 구덩이에 빠지되 물이 없는 빈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함께하심의 형통함이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려할때 미다안 사람 상인에게 팔린 것 또 애굽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에게 팔리지 않고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여인이 있는 보디발에게 팔린 것이 함께하심의 형통함이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옥에 갇힌 것이 함께하심의 형통함이고, 술 관원장이 2년동안 요셉을 잊고 기억을 못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형통함인 것이다.
만일 이런 하나님이 함께하심의 형통하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삼십세에애굽의 총리가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41:41)

세째로 형통은 결국 총리가 되는것이 아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형통인 것이다. 요셉은 자신의 삶이 인간의 눈으로 또 자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형통한 삶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관점과 그의 힘들고 고통의 삶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형통함을 깨닫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에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삶에 형통함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45장7절-8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으 ㄹ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고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라고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약속하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큰 민족을 이루고번성하리라는 말씀을 이루시기위함이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와 함께하시고 그에게 형통함을 주셨다고 그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남들의 삶에 비교할때 힘들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엉뚱한 길로만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지?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형통함,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는 형통함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셉의 믿음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위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함께하시며 형통함을 주시고 계신다고 기도해야할 것이다.

아버지, 요즘 저에게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 생각대로되지 않고 원치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 이 삶, 그러나 이 가운데 아버지가 함께하시어 형통함을 주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뤄가시는 형통함속에 살아감을 믿사오며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뜻이 제 삶에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4월 17일 일요일

마가복음 11:1-18, 2000년전 4월3째 주일 "호산나"를 외쳤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2000년전 4월3째 주일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종려주일이며 바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간이며, 목요일에 붙잡히시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다시 4째주 주일에 부활하시는 주일, 바로 일주일 전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그들의 왕이시며 하늘의 왕으로, 십자가상에서 그 영혼들을 위해 비참하게 죽어야만 하는 사명을 띤 영혼의 구원자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데, 사람들은 종려가지를 흔들고 땅에 깔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고 환호를 하며 육신의 왕이요 정치,경제적인 문제에서 구원할 자로 예수님을 맞이했다.

"호산나", "구원하소서"라며 외쳤지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의 왕이요, 하늘의 왕되심을 외치며 맞이한 것이 아닌 육신의 왕이요, 자신들의 육적인 어려움에서 구원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왕이요, 하늘의왕이 되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5일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무엇을 의마하는 지도 모르는 그들을 보시고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다.

다음날 월요일, 12절, 멀리서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로 열매를 얻기위해 가까이 가셨을때 열매가 없음을 보고 저주를 하시어 나무를 말라죽게했다.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한 나무에게 저주하는 그렇게 냉정한 예수님이신가?

무화과는 6월경 여름에 잎사귀가 나고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4월 3째주라 잎사귀 조차도 없어야 하는 시기에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를 보시고 저주를 하신 것이다.

바로 "호산나" "구원하소서" 하며 예수님을 메시야, 그들의 영혼 구원자로, 왕으로 영접하는 것 같았지만 육적인 구원자 문제 해결자로 영접하고 있는 그들, 바로 열매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였다는 것이다.
잎사귀가 있으면 열매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자로 호산나하며 당연히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늘의 왕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예수님의 하루 전날 주일날의 일을 기억하시고 제자들에게 이 안타까운 마음을 알게하시고 깨우침을 주시기위해 잎사귀는 많으나 열매없는 무화과를 의도적으로 저주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또, 한 사건이 바로 이어지는데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 사람들을 내쫒는  사건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경배하는 성전인 것 같은데 속에 들어가 보시니 돈 바꾸고 매매하는 도둑의 소굴인 것이었다. "호산나"라고 외치고있는 것이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하늘의 왕이요 그 영혼들의 왕이라고 영접하는 것 같은데 속내는, 진정 그 속은 육적인 왕이요, 그들의 어려움을 구원해달라하는 도둑의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우리의 몸은 성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같고 섬기는 것 같은데 우리의 속은 우리 개인의 이익을 구하고 장사하고 돈을 바꾸는 도둑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슴이 아프고 아타까운 마음으로 이 두사건 잎사귀만 많고 열매없는 나무를 저주하시고, 마땅히 하나님를 경배해야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으시면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삶이 바로 잎사귀만 많은나 열매없는 무화가 나무이며,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이나 속으로는 도둑의 소굴인 것이다. 우리의삶을 보시고 저주하시며 속에 있는 도둑같은 사람들을 내쫒으시는 예수님이신 것이다.

주일에 보며 하나님을 경배를 하고 섬기는 참 신자같은데, 잎사귀가 많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같이 경건해 보이기는 하는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보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또 성전안을 도둑의 소굴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주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이 보이는데 평일에는 참 예수님의 제자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삶을 살지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우리의 입으로는 "호산나"하지만  개인적인 이익과 어려울때 해결해주시는 도움으로만 생각하며 예수님을 찾지는 않는지? 말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의 일상은 거짓말하고 신앙에서 벗어난 결정과 행동은 하지않는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은 하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닌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2000년전 4월3째 주일에 "호산나"라며 외치는 사람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 그렇다면 바로 "호산나"라고 외쳤던 그사람들이 금요일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게 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호산나"라고 예수님께 외쳐야할지... 이번 고난주간 우리가 2000년전 4월3째 주일에 외쳤던 그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잎사귀만 많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가 아닌, 또 겉으론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인데 속으로는 장사하는 도둑의 소굴이 아닌  열매맺는 진정한 무화과 나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진정한 성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금요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예수님을 참으로 우리의 왕으로 영접할 수 있고, 또 진정으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칠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잎사귀만 많고 열매없는 무화가 나무가 제 자신이었습니다. 겉으론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인데 속으로는 제 이익을 구하고 세상적인 도둑의 소굴로 만는 것이 바로 제 자신입니다.
2000년전 4우러3째 주일에 "호산나"라며 육적인 왕이요, 자신들의 문제만을 해결해 달라는 그 사람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아버지, 진정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며 진정으로 내 삶을 "호산나" 내 영혼을 "호산나"라고 외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진정 예수님이 원하셨던 내 영혼의 왕이요, 구세주요, 내 삶의 주인으로 다시금 제대로 외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4월 6일 수요일

바디메오가 눈은 뜨게된 이유는?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바디메오 우리에게 잘알려진 이름이다.
바디메오가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때문(52절)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 그의 믿음이 어떠했기에 그의 믿음때문에 눈을 뜰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앞을 못보는 맹인이었던 바디메오 그러나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거지였다는 사실, 하루 하루를 살기위해 그는 동냥을 해야만 했다. 남에게 동전을 구걸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만 했던 초라한 그사람, 앞이 보이지 않은 것도 인생을 탓하면서 살아도 부족한데 거기다 거지의 신세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오늘은 얼마나 많은 동정을 받는가 였다. 조용히 머리를 푹 숙이고 말도 없이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동전을 던저주고 아무도 동전을 던저 주는 사람이 없으면 손에 가지고 있는 동전으로 소리를 내어 동전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 길거리에 앉아 사람들의 움직임과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 동전을 던저주지는 않은지 긴 하루를 보내고 있을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게된다. 사람들은 한 시골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해서 얘기할때 그는 메시야로 오신 다윗의 자손 예수로 듣고 있었다. 자신을 구할 메시야 예수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목매이고 최대의 관심사 동전 몇푼을 땅에 버려두고 지금까지 큰 소리로 한번도 질러보지 못한 목소리로 목이 터저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그러자 사람들이 이 맹인 거지가 미쳤나 하며 조용히 하라고 저지하자 사람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짓음은 곧 "메시야 예수시여 나를 구원하소서"였다.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달라는 울부짖음이었으며, 자신의 초라하고 비참한 삶을 구해달라는 간구였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보기를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는 그가 메시야 예수가 자기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보게되었다. 누가복음 18장 43절에는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그의 믿음이었는가?

첫때는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외칠때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있었다. 자신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고 구원해 주시기에 오신 메시야임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가?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알때 비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내 삶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내 머리카락까지도 세고 계시는 나를 너무 나도 잘 아시는 주님으로 알고 있는가? 나와 깊은 교제를 갖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가 말이다.

그의 믿음은 둘째로 자신의 가치를 내려놓는 믿음과 외치는 믿음이었다. 그가 자신을 감추기위해 소리도 내지않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흔들던 그가 또한 동전 하나에 목을 빼고 사람들의 움직임에 모든 관심이 쏠려 동전 깡통을 움켜쥐고 있던 그는 과감하게 가장 소중한 그 가치 동전깡통을 내던지고 목소리를 내어 아니 목이 터저라고 예수님을 불렀다.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관리를 위해 예수님 보다는 남의 평가, 눈치 또 내가 아끼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지나가심을 듣고도 그것을 내려두지 못하고 예수님을 불러보지도 못하지는 않은지... 과감하게 절대 놓칠 수 없는 동전 깡통을 내던지고 목이 터저라고 예수님을 불러야 한다. 예수님!, 나의 구세주 예수님, 나의 주님되신 예수님 내삶의 오셔서 나를 고쳐주시고 인도하여 달라고 외쳐야한다. 나에게 주신 이 고통과 어려움의 깊은 뜻을 깨닫고 주의 뜻에 순종하고 이 낙심되고 지쳐있는 삶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바로 이 믿음때문에 이 간절함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간구를 들어주신 것이다.
우리도 먼저 바로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꼭 붙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불러야 한다.

"예수님!, 내 주님 되신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2011년 4월 4일 월요일

출 40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출애굽기 마지막장 40장은 성막을 다 짓고난뒤 성막을 봉헌하는 내용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나하나, 작은 것 하나라도 그대로 다 행했다고(16절) 고백하며, 40장에서만 7번을 반복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가운데 하나님이 임하는 것이다.
33절에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매, 여기서 이같이는 여호와가 명령하신대로 행한대로 역사를 마쳤다는 것이며,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던 것이다.(34절).

언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가? 바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우리의 삶속에 이뤄가시는 뜻과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때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가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할때 행진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가고 섬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다 행해야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지신 뜻과 목적 그것을 이뤄가시는 명령을 들어야 순종하고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기에(33:11; 34:29) 하나님의 명령을 듣을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나?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는가? 바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는가? 모세는 40일 동안 음식도 물조차도 마시지않고(34:28)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하루에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가? 기도는 얼마나 하는가? 우리의 삶에 뜻과 목적을 두시고 이뤄가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도의 무릎을 달궈야한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하는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께 물으면 아버지께서 대답해주시고, 아버지와 대화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대화하는 기도를 하기를 원합니다. 내 삶의 모든 일에 깊에 관여하시고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을 아버지와 상의하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다 행하기를 원합니다.
말씀하여 주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옵소서,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