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인가?

누가복음 9장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다, 예수님을 따른다, 예수님을 믿는다, 또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고까지 한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누가복음 9장 23절에 보면,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란, 다른 말로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이라고 전제하시며 조건을 말씀하신다.
 1)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위해 십자가에 달리실 그 시간 만큼은 자신을 부인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임을 철저하게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의 죄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리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
- 이재훈이는 더이상 없다 내 삶에 오직 주님뿐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 삶에 내가 있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과 목적만이 내 삶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재훈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벌래만도 못한 인간인 것이다. 우리가 뭔가 가졌다고? 권한, 권력, 지위가 있다고? 우리는 아무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에 의해, 주님을 위해 존재 한다고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이재훈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주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 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내가 뭘 잘했다고, 내가 뭘 잘한다고,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우리가 교회를 위해 무었을 했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가? 아무리 교회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큰 일을 했다할 지라도 당연한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로 한 것뿐이며, 우리는 아무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가? 우리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우리의 생각과, 얼굴과 말과 행동과 그리고 마음과 더 깊은 우리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 없는가 말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한다면 우리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고, 우리 마음대로 말할 수 없으며, 우리 마음대로 얼굴을 붉힐 수 도 없으며, 우리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의 생각을 통해, 우리의 입을 통해, 우리의 얼굴과 행동을 통해 또 우리의 마음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우리를 부인하는 말과 행동인지 자신에게 물어봐야할 것이다.
만약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아니라며 우리는 감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그럼,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를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얼굴, 생각, 입술, 행동, 마음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또 두번째의 조건으로,
2)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지만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또, 왜 그냥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시지 않고 "날마다"라는 형용사를 붙이셨을까?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더중요한 것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는가 이다.
날마다라고 하신 이유는,
- 십자가를 지는 유효기간이 단 하루이기때문이다. 오늘 내 십자가를 지었다고 일주일 쉬고 십자가를 않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오늘 진 우리의 십자가의 효력은 오늘로써 끝이 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반복되어져야 하기에 날마다 져야한다. 이미 진 십자가 또 질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몇번이고 진 십자가인데 하며 십자가를 지지 않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날다마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습관이 되야 하기에, (반복학습은 습관을 만든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 같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날마다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져야하는 것이다.
30년 십자가를 졌는데 하며 더 이상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때까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죽을때까지 따라간다면 우리는 죽을때까지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각자가 지어야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 좋던 싫던 내가 지어야할 십자가이다, 현 상황, 현재 원하던 원하지않던 감당해야할 십자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잔을 지나가게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실때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그 것을 원치 않으셨다. 아니 정말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좋던 싫던 지셔야했던 십자가였으며, 그 십자가를 지셨다.

- 내가 태어나고, 살아야 할 목적을 주는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목적,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즉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태어나시고 살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 하나님이 내 삶에 주신 뜻을 이루기위한 필수적인 고통의 십자가./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주님의 외침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감당해야한 고통의 십자가처럼, 우리가 이땅에 보내심을 받고 살아가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감당해야할 고통과 어려움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따라가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가?

주님,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부인해야하며 날마다 내 십자가를 져야함을 압니다.
그래도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갈 힘을 주옵시고, 주님의 강한 팔로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시고 짊어지신 십자가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때 성벽 위의 라합의 집은?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리고성을 6일간 하루에 한번씩, 그리고 7일째에는 7번을 돌고 나팔과 큰소리를 지르자 여리고성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이었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게되는 큰 은혜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넘쳤다

여호수아 6:20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물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때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성을 점령하고"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여호수아6:2)하셨는데 왜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함락하게하셨을까?
바로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미리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고 그안에 사람들을 칼로 치시고 더 쉽게 여리고성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왜 성벽을 무너뜨리셨어야 할까?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떤 방법이던지 여리고성을 함락할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 도 있다.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여리고성을 함락하는 것이었기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방법이라도 그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라합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선택이었지않았을까? 라합의 온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벽위해 살고있던것을 아시면서 일부러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여호수아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위에 거주하였음이라"

2명의 정탐군을 구해주고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있던 라합에게 이 성벽 위에 집에 있어 붉은 줄을 매달고 있으면 살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으신 것이다.
그가 믿고 있던 성벽위에 집과 붉은 줄, 바로 성벽위에 집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정탐군을 성벽으로 도망보낼 수 있었고, 성벽에 붉은 줄을 내려 이스라엘백성이 침략하러올때 보이도록 할 수 있었던 정말 좋은 위치, 성벽 위의 집을 굳게 믿고 있었다.
라합은 정말 이 성벽위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라도 하면서 바로 이 성벽위의 집에 살았기에 살 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않았을까?

그런데, 갑자기 성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성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소리에 얼마나 무서웠고 두려웠겠는가?
바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함락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한 방법 곧 성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시작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아니 오히려 성벽위에 집이 아니라 성안의 집에 살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을 하면서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하필 왜 성벽을 무너뜨리며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오냐며 이제까지 성벽위에 집에 거주함으로 살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접고 옆에서 무너져내리는 성벽을 보며 눈을 감고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이제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할때, 굳게 믿고 있었던 성벽이 무너져 내릴때 하나님은 역사를 하고 계셨다.
라합과 그의 온 가족을 살리시기위해 모든 성벽은 무너뜨리되, 라합이 살고있는 성벽위의 집, 그 집을 떠 받치고있는 성벽은 무너뜨리지 않으신것이다.
상상을 해보면 양 옆 온주위의 성벽이 무너져내리는데 라합이 살고 있는 성벽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이얼마나 기적같은 일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이신가? 단지 성벽위에 집에 있었기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오직 라합이 있는 성벽만을 무너뜨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직접 보호하셔서 살수 있었음을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구원하시기위해 온 성벽이 무너지지만 라합의 성벽만을 무너뜨리지 않고 보전하신다는 것을 라합으로 보게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붙들고 있는 것 때문에 살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붙들고 있는 그 자체가 아닌 살아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신앙, 생각, 주장, 믿음때문에 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때문에 사는 것을 잊은채 그 신앙, 믿음, 주장을 붙들고 있기에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그가운데, 이방인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위해 온 성벽을 무너뜨리는 가운데 그가 살고 있는 그 성벽을 보호하신 것이다.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제는 죽었구나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 이곳이 다 무너져 내리는데 우리는 죽는구나 할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무너져내리는 성벽가운데에서고 우리의 성벽만큼은 붙들고 계신것이다.

라합을 살리시기위해 살아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보고 경험하게 하시기위해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주님, 우리 주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다들 죽는다고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있는 곳, 이곳 만큼은 직접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함께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크로스비 - 찬송가작시자

크로스비는 의사의 실수로 생후 6개월만에 맹인이 되고 말았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하며 인사해 주었다.

그녀는 8,000여편에 이르는 찬송가를 작시했는데, 무릎을 꿇지 않고는 단 하나의 찬송가도 쓰지 않았다. 우리 찬송가에도 그녀의 것이 20여편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391편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는 매우 아름다운 시로 유명하다.

어느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왜 하나님꼐서 당신에게 그렇게 많은 재능을 주셨는데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셨는지 안타깝기만 하군요", "만일 제가 이 땅에 태어났을때 한가지 간구할 수 있었다면, 저는 제가 장님이 되게 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니, 왜 그렇습니까?" "제가 하늘 나라에 갔을때 맨 처음 보는 분이 주님이실테니까요"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신앙인은 불운을 불평하기 않고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조금의 동정심도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히11:1

2011년 7월 10일 일요일

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데....

에스겔 11장 18절-21절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한 마음이 되려고, 마음을 같이 하려고 해도 않된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한 마음을 갖기가 쉽지가 않다. 왜 그렇까?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아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려면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한 마음과 새영을 주셔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한 마음(히브리어로 "레브 에하드") 또는 일치하는 마음을 주시기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이 다 다르고 의견이 틀린데 무엇을 기준으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미 굳어져 딱딱해진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부드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불가능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마음을 주신다면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 마음 속에 돌 같이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주시는 하나님의 한 마음을 갖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마음을 주시며 또한 새 영을 주셔서 돌 같이 딱딱해진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한 마음을 가지는 길은 하나님이 주실때에만이 가능한 것이며 그 한 마음과 새 영을 가질때만이, 하나님이 중심이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 하나님께 속한 새 영, 하나님의 영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우리가 애써 부드럽게 하려고 해보지만 결국 조금을 못버티고 다시 굳은 마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한 마음을 가지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한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과 새 영, 하나님의 영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중심의 한 마음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속한 새 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 이 한 마음과 새영을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며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18절과 21절에 분명히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운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속에 있는 하나님 보다는 앞세우고 중요시하는 우리의 의, 주장, 생각, 판단, 자존심, 명분, 법, 상식, 타당성등을 제거해야한다. 인간적인 모든 방법, 목적을 이루기위한 모든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생각과 가증한 것을 제거해야지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잘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말이 맞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나님편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일까? 내면 깊이 들어가보고 정말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든 생각, 하나님이 가증하다고 말씀하시는 모든 방법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한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제거해야만이 하나님께서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 마음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요구인 것이다.
한 마음이된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이 한 마음가 새영을 받은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20절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다시 한번 21절에 단호하게 하나님은 미운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는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고 말씀하시며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을 하고 계신다.
정말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님, 우리의 방법으로 생각으로 한 마음을 달라고 요구했던 어리석었던 저희를 용서하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해 하시는 것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한 마음과 새 영을 받을 수 없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고 놓지않는 것들, 우상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생각과 방법들을 제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모든 것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 삼으시는 한 마음을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고 한 마음과 새영을 주시기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