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소의 목에 메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이유는?
마태복음 11장28절-30절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일상의 삶속에 지치고 수고하고 무겁게 짐을 진 자들에게 모두 다 예수님께 오라고 초청하신다. 우리의 개인적인 일에 또, 하나님의 일에 신경쓰고 애를 쓰며 수고하고 지친 모습으로 어깨에 잔뜩 책임과 의무를 짊어진채 쓰러질 정도의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라하시면서 우리를 쉬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어찌 평안의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인가? 우리의 수고를 아시고 우리를 쉬게하시려고 부르시는 자상하시고 사랑 많은 예수님의 부르심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수고한자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오라 하시면서 그들을 쉬게하시는 방법이 소나 말의 목에 메는 멍에, 곧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 말씀하신다. 짐을 짊어지고 지친 우리에게 여기에 짐을 내려 놓으라 하시면서 짐을 얼른 받아주시고 우리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더 지우시겠다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것도 짐을 지우시는데 어깨에 이미 짐을 지고 있으니 이제는 목에까지 멍에를 메라고 하시지 않는가?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우리에게 짐을 더 지우시면서 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거기다 좀 쉬었으면 하는 우리에게 목에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시고 계신다. 삶에 지친 우리에게 쉴 시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또 배우라고 하시고 계신다.
목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울때,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것인가?
문제는 쉼에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쉴줄을 몰라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발생은 우리가 잘못 수고하고, 잘못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지 못한 수고를 하기에, 잘못된 짐을 지고 있기에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쉼을 얻는 것은 그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도 짐을 지고도 하나도 피곤치 아니하고, 또 땀을 흘리며 수고를 해도 피곤치 않고 짐을 짊어져도 무겁게 느껴지지않는 마음의 쉼, 진정한 쉼을 얻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한자들에게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신다. 왜냐면 우리는 엉뚱한 수고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수고를 해야하는데,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하시는 그 목적과 뜻대로 수고하면서 살아야하는데 자신을 위한 수고,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기위해 수고하고 있으니 피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고를 하셨기에 피곤치 않으시고 쉼을 얻고 계셨던 것이다.
또,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왜냐면 우리는 엉뚱한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의 짐, 욕심의 짐, 개인적인 목적과 목표를 이뤄야 한다는 짐, 남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야하는 짐, 교회에서 거룩하다고, 신앙 좋다고 인정 받아야하는 짐을 짊어져야하기에 우리는 피곤하고, 지치고, 쓰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짐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는 무엇인가?
소나 말에 목에 짊어지게하여 제 멋대로 행동하지않고 통제를 받으며 주인의 이러저리 밭을 갈기위해 이끄는대로 따라 가게끔하는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인 것이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도 십자가상의 죽음이 무섭고 떨리고 싫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 오신 목적 바로 십자가상의 죽음, 구속 사업을 이루기위해 벗을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목에 메게하신 멍에을 메시고 순종하셨다.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 멍에를 짊어 지신 것이다. 이 멍에를 바로 우리에게 짊어 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이뤄야할 멍에, 바로 삶의 존재를 가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의 쉼을, 영혼의 쉼을,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멍에는 30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고와 짐은 쉽고 가볍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수고한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신것은 예수님께 배우는 수고는 쉽기 때문인 것이다. 쉽기 때문에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다. 만일 어렵다면 쉼이 되겠는가?
또한, 짐을 진자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짐이 무거우면 쉼이 되겠는가?
그렇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수고가 쉽고 예수님이 짊어지신 멍에가 가벼우니 당연히 피곤하지않고, 지치지않고, 힘들지 않는 것이다. 바로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다.
삶에 지쳐있는가? 피곤하고 지쳐있는가? 낙심이되고 다 내려놓고 싶은가?
우리는 무엇에 수고하고 무슨 짐을 짊어 지고있는지를 다시 확인 해봐야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쉬게하신다고 하신다.
진정한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만 한다.
주님! 우리는 엉뚱한 수고와 엉뚱한 짐을 짊어지고 힘들어하고 무거워해왔습니다.
세상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게하시어, 다시는 힘들다고, 너무 무겁다고, 지쳐 쓰러진다고 하지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지신 멍에,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 나가는 수고와 짐을 지게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쉽고도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영혼 깊은 진정한 쉼을 얻게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쉼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을 따라 살려는 모든 중앙 청년들에게.....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2011년 8월 28일 일요일
2011년 8월 23일 화요일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많았던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많이 들어왔다. (눅15:11-32)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아들 바로 탕자. 탕자의 뜻은 방탕하게 사는 사람을 뜻하며,그리고 방탕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음"으로 정확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지못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왜 살아야하는 알지못한채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둘째아들이 탕자라고 알고있지만 진정 깊이 들어가보면, 두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탕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얘기할때 둘째 아들은 돌아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때 정작 내색은 하지않았지만 큰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그의 속 마음은 우리가 잃지 못하고 있다.
큰 아들은 마치 아버지를 생각하는 착한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게 보이지만, 눅15: 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 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니 아버지의 전 재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아들이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을때 정말 큰 아들이 유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둘째 아들인 동생을 나무라면서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런 불효자식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크게 흥분하면서 끼어 들었어야 한다. 왜냐면 맏 아들은 성질이 급한고 화를 잘내는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기때문이다.
어떻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느냐면,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는 화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온 동생이 얼른 보고 싶을 텐데도 너무 반갑고 좋을 텐데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얼마나 화가났으면 안으로 들어가지않고 버티다가 아버지가 나와서 권할때까지 분해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따지고 든다. 29절-30절.
그런데 그는, 동생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옆에서 듣고만 있고 아무말이 없었다.
어쩌면 항상 아버지의 재산에 마음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가 생각에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나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철없는 동생이 유산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지않는가? 말도 않되는 소리이지만 둘째가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데 과연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하며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혹시 유산을 미리 주지는 않을까?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 유산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무 얘기도 하지않은 자기에도 말이다.
12절 "각각 나눠주었더니"라는 말을 우리는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큰 아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는데 아버지는 각각 큰 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신 것이다.
우리는 둘째 아들만 유산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큰 아들도 유산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 각각 나눠주었다고.
큰 아들은 단지 그것을 탕진하지 않고 주신 재산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펄쩍 뛰면서 그러시면 않된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않받겠다고 해야하는 하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대로 받은 것이다.
그럼, 둘째아들과 뭐가 다른가? 둘째는 그것을 현찰화시켜 돈으로 가지고 먼 나라로 간 것이다.
13절, "그 후 며칠이 않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몇일 만에 아버지께서 주신 유산을 현찰로 만들어 간 것을 볼때 아마도 큰 형이 바꾸어 주지않았나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항상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기때문에 소, 양, 염소, 집등등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의 몫으로 준 유산을 헐 값에 동생에게 사고 돈으로 바꿔주었을 것이다.
또 큰 형이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둘째가 돌아왔는데 자기의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중에 살진 송아지를 그 동생을 위해 잡아준 것이 너무 화가난 것이다. 동생의 생명이 살진 송아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온통 아버지의 재산에 집중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간섭과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떠나 자유롭게 혼자 자기 인생을 살아보기를 원하고 혼자서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둘째 아들이 가졌던 관심을 위해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나니 결국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없음을 때단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자기를 안아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는 아버지를 보고 다시금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되었고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함께하심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함께하심의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와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갖고있는 재산에 관심이 있어 정말 아버지와 함께하는 은혜를 모른채 바로 방탕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들떠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지 어떤 은혜인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말에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보다는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바로 알면 아버지가 가진 것이 다 아들의 것으로,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아버지와의 관계, 함께 거함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 관심이 쏠려있는 큰 아들을 깨우쳐주신다.
또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 혼자 살려고 했으나
결국 아버지와 함께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것을 깨다고 돌아왔음을 아버지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쩌면 큰 아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버지랑 함께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심의 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에, 교회에 직분이 있다는 것에, 교회에서 거룩해 보여지는 것에, 아니 하나님이 주실 복에 관심이 있고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탕자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신앙의 삶이 근본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함께함으로 오는 것에 대한 관심, 교회생활로 얻어지는 것들, 교회의 직분을 가짐으로 받게되는 것에, 교회 봉사를 함으로 인정받게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안에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바로 탕자인 것이다.
주님, 우리가 탕자였습니다. 교회안에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과 함께하심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품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아버지의 품과 함께하심의 은혜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많이 들어왔다. (눅15:11-32)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아들 바로 탕자. 탕자의 뜻은 방탕하게 사는 사람을 뜻하며,그리고 방탕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음"으로 정확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지못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왜 살아야하는 알지못한채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둘째아들이 탕자라고 알고있지만 진정 깊이 들어가보면, 두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탕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얘기할때 둘째 아들은 돌아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때 정작 내색은 하지않았지만 큰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그의 속 마음은 우리가 잃지 못하고 있다.
큰 아들은 마치 아버지를 생각하는 착한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게 보이지만, 눅15: 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 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니 아버지의 전 재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아들이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을때 정말 큰 아들이 유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둘째 아들인 동생을 나무라면서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런 불효자식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크게 흥분하면서 끼어 들었어야 한다. 왜냐면 맏 아들은 성질이 급한고 화를 잘내는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기때문이다.
어떻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느냐면,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는 화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온 동생이 얼른 보고 싶을 텐데도 너무 반갑고 좋을 텐데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얼마나 화가났으면 안으로 들어가지않고 버티다가 아버지가 나와서 권할때까지 분해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따지고 든다. 29절-30절.
그런데 그는, 동생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옆에서 듣고만 있고 아무말이 없었다.
어쩌면 항상 아버지의 재산에 마음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가 생각에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나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철없는 동생이 유산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지않는가? 말도 않되는 소리이지만 둘째가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데 과연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하며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혹시 유산을 미리 주지는 않을까?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 유산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무 얘기도 하지않은 자기에도 말이다.
12절 "각각 나눠주었더니"라는 말을 우리는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큰 아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는데 아버지는 각각 큰 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신 것이다.
우리는 둘째 아들만 유산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큰 아들도 유산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 각각 나눠주었다고.
큰 아들은 단지 그것을 탕진하지 않고 주신 재산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펄쩍 뛰면서 그러시면 않된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않받겠다고 해야하는 하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대로 받은 것이다.
그럼, 둘째아들과 뭐가 다른가? 둘째는 그것을 현찰화시켜 돈으로 가지고 먼 나라로 간 것이다.
13절, "그 후 며칠이 않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몇일 만에 아버지께서 주신 유산을 현찰로 만들어 간 것을 볼때 아마도 큰 형이 바꾸어 주지않았나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항상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기때문에 소, 양, 염소, 집등등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의 몫으로 준 유산을 헐 값에 동생에게 사고 돈으로 바꿔주었을 것이다.
또 큰 형이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둘째가 돌아왔는데 자기의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중에 살진 송아지를 그 동생을 위해 잡아준 것이 너무 화가난 것이다. 동생의 생명이 살진 송아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온통 아버지의 재산에 집중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간섭과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떠나 자유롭게 혼자 자기 인생을 살아보기를 원하고 혼자서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둘째 아들이 가졌던 관심을 위해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나니 결국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없음을 때단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자기를 안아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는 아버지를 보고 다시금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되었고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함께하심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함께하심의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와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갖고있는 재산에 관심이 있어 정말 아버지와 함께하는 은혜를 모른채 바로 방탕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들떠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지 어떤 은혜인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말에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보다는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바로 알면 아버지가 가진 것이 다 아들의 것으로,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아버지와의 관계, 함께 거함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 관심이 쏠려있는 큰 아들을 깨우쳐주신다.
또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 혼자 살려고 했으나
결국 아버지와 함께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것을 깨다고 돌아왔음을 아버지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쩌면 큰 아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버지랑 함께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심의 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에, 교회에 직분이 있다는 것에, 교회에서 거룩해 보여지는 것에, 아니 하나님이 주실 복에 관심이 있고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탕자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신앙의 삶이 근본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함께함으로 오는 것에 대한 관심, 교회생활로 얻어지는 것들, 교회의 직분을 가짐으로 받게되는 것에, 교회 봉사를 함으로 인정받게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안에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바로 탕자인 것이다.
주님, 우리가 탕자였습니다. 교회안에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과 함께하심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품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아버지의 품과 함께하심의 은혜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8월 18일 목요일
깨닫지 못하고 알고만 있었던 것때문에 망한 삼손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신을 위해 쓰다가 결국 망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손에 대해 우리는 잘안다.
사사기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삼손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알다" 또는 "알려주어 알게하다"와 "알지 못하다"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온다.
13:16 ...그가 여호와의 사지인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3:26...그제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14:4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6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14:9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니 아니하였더라, 14:16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알려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하리요..., 14:17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주매.... 알려주었더라, 16: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삼손의 부모도 삼손을 택하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삼손도 자신의 비밀을 알면서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큰 힘이요 능력인줄 생각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맨손으로 사자를 찟었던 일도 부모에게도알리지않았고, 그 후로도 2번 더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큰 힘을 낸 일도, 또 자기의 아내에게도 수수께끼의 답을 알리지않다가 결국 알게하여 아내를 빼아기게 되고, 자신의 힘의 비밀도 결국 들릴라에게 알게하여줌으로 두 눈이 뽑히고 망하게되는 삶을 살게된다.
그는 자신가 알고 있는 비밀이 힘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힘이 아닌 것을 마지막 죽기전에야 깨닫게된다.
자신의 힘의 원천이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않는데서 오는 줄알았지만, 16:20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들릴라에게 머리가 밀린후 힘을 쓰려고 했지만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게 되었던 사실을 알지못했다고 하지않고 여기서는 깨닫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삼손이 여지껏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머리로 일어나는 사실을 안 것이었지 그 사실뒤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넘어 깨닫는데 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실인으로 택하신 것은 알았지만 왜, 무엇을 위해 택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구원의 예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 내삶 속에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비밀은 절대로 우리에게 힘이 또 능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삼손처럼 아는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망하게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지못하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살다가 결국 깨닫지 못했기에 삶을 망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 다고 능력의 삶을 살수 있는가?
깨닫는 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안다는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 마음으로 알게되어 그 뜻을 이해하고 내 삶의 일부가 되어지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않는다. 삶에 나타나지않는다. 깨달을때에야 행동으로 또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깨달을 때에 힘이 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단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 않은 사실을 안다는 것으로, 남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을뿐 그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고 왜, 또 무엇을 위해 오는지를 알지 못했던 삼손,
우리는 제 2의 삼손이 아닐까?
주님, 주님을 알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알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라하여 내 삶속에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이유를, 그분의 뜻과 목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알고 내 삶 깊이 깨달아져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나고 또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사기 13장에서 16장에 걸쳐 삼손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알다" 또는 "알려주어 알게하다"와 "알지 못하다"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온다.
13:16 ...그가 여호와의 사지인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13:26...그제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14:4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6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14:9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니 아니하였더라, 14:16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알려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하리요..., 14:17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주매.... 알려주었더라, 16: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삼손의 부모도 삼손을 택하신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삼손도 자신의 비밀을 알면서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큰 힘이요 능력인줄 생각했다.
삼손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여 맨손으로 사자를 찟었던 일도 부모에게도알리지않았고, 그 후로도 2번 더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큰 힘을 낸 일도, 또 자기의 아내에게도 수수께끼의 답을 알리지않다가 결국 알게하여 아내를 빼아기게 되고, 자신의 힘의 비밀도 결국 들릴라에게 알게하여줌으로 두 눈이 뽑히고 망하게되는 삶을 살게된다.
그는 자신가 알고 있는 비밀이 힘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힘이 아닌 것을 마지막 죽기전에야 깨닫게된다.
자신의 힘의 원천이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않는데서 오는 줄알았지만, 16:20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들릴라에게 머리가 밀린후 힘을 쓰려고 했지만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게 되었던 사실을 알지못했다고 하지않고 여기서는 깨닫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삼손이 여지껏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머리로 일어나는 사실을 안 것이었지 그 사실뒤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넘어 깨닫는데 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실인으로 택하신 것은 알았지만 왜, 무엇을 위해 택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구원의 예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 내삶 속에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비밀은 절대로 우리에게 힘이 또 능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삼손처럼 아는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망하게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지못하고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 살다가 결국 깨닫지 못했기에 삶을 망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안 다고 능력의 삶을 살수 있는가?
깨닫는 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안다는 것이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 마음으로 알게되어 그 뜻을 이해하고 내 삶의 일부가 되어지는 것이 깨닫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않는다. 삶에 나타나지않는다. 깨달을때에야 행동으로 또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깨달을 때에 힘이 나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단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머리를 밀지 않은 사실을 안다는 것으로, 남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을뿐 그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고 왜, 또 무엇을 위해 오는지를 알지 못했던 삼손,
우리는 제 2의 삼손이 아닐까?
주님, 주님을 알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알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라하여 내 삶속에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이유를, 그분의 뜻과 목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알고 내 삶 깊이 깨달아져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데 힘이나고 또 능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8월 2일 화요일
하나님은 왜 불평할 만한 조건과 환경을 우리에게 남겨 두시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어....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못했다?
여호수아가 죽기전에 사생결단을 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한다(여호수아24:15).
여호와를 택할지 아니면 우상을 택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여호수아의 강경한 입장에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대답을 한다(여호수아24:15).
드디어 여호수아가 죽고난 후 사사시대가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제비뽑아 얻은 땅을 각 지파별로 차지하라하신다.
사사기 1장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까"하고 묻자 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이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하시어 유다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을 치고(4절), 예루살렘과 헤브론까지 쳐서 땅을 차지하였다.(8절-9절)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가나안 족속들을 넘겨주시어 다른 지파들도 그들을 쳐서 진멸케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겨주신 가나안 족속들을 전부 진멸하지못하고 19절,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1절,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9절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31절에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1장에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여덟번이 나올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신 가나안 족속을 전부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게되고 하나님을 떠나는 죄악에 빠지게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않고 가나안족속을 다 진멸하지않고 쫓아내지 않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사사기1장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22절에도 요셉의 가문에게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분명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셨다.
그러나, 19절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 철 병거가 있어 그들을 진멸하지못하고 쫓아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믿음이 없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계서 쫓아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정말 상반되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않는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이 직접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게 섭리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고 남겨두면 분명히 그들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것을 아시기에 진멸하고 다 쫓아내라고 명령까지 하셨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2장23절에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3장2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하나님은 분명히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말고 놀라지말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함께하심과 가나안 족속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전부 다 붙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손에 모두 넘겨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또 우리가 하나님보다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버리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남겨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다른 이목꺼리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에서 멀리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믿음이 연약하여 죄에 빠질 수 있는 환경들을 나두신다는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시면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주의 사랑으로 형제를 무조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2장 22절에,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3장 2절,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하셨더라"
그 이유는, 다 쫓아내지 않고 남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는지 아니 섬기느지 시험하려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다른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죄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조건이 있음에도 죄에 빠지지않나 보시려고 하신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가 되는지를 보려고 하시는 것이며, 주의 사랑으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음에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믿음이 있고, 말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는지,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행동이 없는 능력없는 믿음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마음으로, 진실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며, 온전한 믿음을 갖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처해있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탓한다. 우리는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조건과 나쁜 환경을 탓하기전에,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왜?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섭리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두신 환경과 조건 넘어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볼수 있어야 한다.
주님, 주위의 환경을 보게 하지마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하여 주옵소서.
주위의 조건과 환경에 집중하지않게 하시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수아가 죽기전에 사생결단을 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한다(여호수아24:15).
여호와를 택할지 아니면 우상을 택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여호수아의 강경한 입장에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대답을 한다(여호수아24:15).
드디어 여호수아가 죽고난 후 사사시대가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제비뽑아 얻은 땅을 각 지파별로 차지하라하신다.
사사기 1장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까"하고 묻자 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이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하시어 유다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족속을 치고(4절), 예루살렘과 헤브론까지 쳐서 땅을 차지하였다.(8절-9절)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가나안 족속들을 넘겨주시어 다른 지파들도 그들을 쳐서 진멸케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겨주신 가나안 족속들을 전부 진멸하지못하고 19절,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1절,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9절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31절에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1장에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여덟번이 나올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신 가나안 족속을 전부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게되고 하나님을 떠나는 죄악에 빠지게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않고 가나안족속을 다 진멸하지않고 쫓아내지 않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사사기1장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22절에도 요셉의 가문에게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분명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셨다.
그러나, 19절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으로 보기에 철 병거가 있어 그들을 진멸하지못하고 쫓아내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믿음이 없어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계서 쫓아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정말 상반되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않는가?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 손에 넘기시고 함께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결국 하나님이 직접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게 섭리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고 남겨두면 분명히 그들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것을 아시기에 진멸하고 다 쫓아내라고 명령까지 하셨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쫓아내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2장23절에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셨더라.
3장2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하나님은 분명히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말고 놀라지말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함께하심과 가나안 족속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전부 다 붙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손에 모두 넘겨주시지 않으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또 우리가 하나님보다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버리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것들을 우리의 삶에 남겨 두신다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다른 이목꺼리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에서 멀리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믿음이 연약하여 죄에 빠질 수 있는 환경들을 나두신다는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시면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주의 사랑으로 형제를 무조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남겨두신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2장 22절에,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3장 2절,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이방 민족들은, 4절, 남겨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하셨더라"
그 이유는, 다 쫓아내지 않고 남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는지 아니 섬기느지 시험하려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다른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죄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조건이 있음에도 죄에 빠지지않나 보시려고 하신 것이다.
주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가 되는지를 보려고 하시는 것이며, 주의 사랑으로 무조건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음에도 사랑하는지 시험을 하려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믿음이 있고, 말로만 신앙이 있다고 하는지,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행동이 없는 능력없는 믿음 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마음으로, 진실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지 시험하시며, 온전한 믿음을 갖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처해있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탓한다. 우리는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조건과 나쁜 환경을 탓하기전에,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왜?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섭리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두신 환경과 조건 넘어의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볼수 있어야 한다.
주님, 주위의 환경을 보게 하지마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하여 주옵소서.
주위의 조건과 환경에 집중하지않게 하시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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