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3일 화요일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많았던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많이 들어왔다. (눅15:11-32)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산 둘째아들 바로 탕자. 탕자의 뜻은 방탕하게 사는 사람을 뜻하며,그리고 방탕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이 들떠 갈피를 잡을 수 없음"으로 정확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지못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왜 살아야하는 알지못한채 엉뚱한 곳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둘째아들이 탕자라고 알고있지만 진정 깊이 들어가보면, 두 아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맏아들이 탕자였던 것이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 얘기할때 둘째 아들은 돌아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 때 정작 내색은 하지않았지만 큰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유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그의 속 마음은 우리가 잃지 못하고 있다.

큰 아들은 마치 아버지를 생각하는 착한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게 보이지만, 눅15: 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하는 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니 아버지의 전 재산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아들이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을때 정말 큰 아들이 유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둘째 아들인 동생을 나무라면서 아버지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런 불효자식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크게 흥분하면서 끼어 들었어야 한다. 왜냐면 맏 아들은 성질이 급한고 화를 잘내는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기때문이다.

어떻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느냐면, 둘째가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그는 화를 내면서 안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아온 동생이 얼른 보고 싶을 텐데도 너무 반갑고 좋을 텐데도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에 대해 얼마나 화가났으면 안으로 들어가지않고 버티다가 아버지가 나와서 권할때까지 분해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따지고 든다. 29절-30절.

그런데 그는, 동생의 말도 안되는 요구를 옆에서 듣고만 있고 아무말이 없었다.

어쩌면 항상 아버지의 재산에 마음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가 생각에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나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철없는 동생이 유산을 달라고 말을 하고 있지않는가? 말도 않되는 소리이지만 둘째가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는데 과연 아버지는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하며 속으로 궁금해 하면서 혹시 유산을 미리 주지는 않을까?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께서 유산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무 얘기도 하지않은 자기에도 말이다.
12절 "각각 나눠주었더니"라는 말을 우리는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큰 아들의 마음을 아셨는지, 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는데 아버지는 각각 큰 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유산을 나눠주신 것이다.
우리는 둘째 아들만 유산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큰 아들도 유산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 각각 나눠주었다고.
큰 아들은 단지 그것을 탕진하지 않고 주신 재산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면 당장 펄쩍 뛰면서 그러시면 않된다고 하면서 거부하고 않받겠다고 해야하는 하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좋아하면서 그대로 받은 것이다.
그럼, 둘째아들과 뭐가 다른가? 둘째는 그것을 현찰화시켜 돈으로 가지고 먼 나라로 간 것이다.
13절, "그 후 며칠이 않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몇일 만에 아버지께서 주신 유산을 현찰로 만들어 간 것을  볼때 아마도 큰 형이 바꾸어 주지않았나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항상 처음부터 관심이 많았기때문에 소, 양, 염소, 집등등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의 몫으로 준 유산을 헐 값에 동생에게 사고 돈으로 바꿔주었을 것이다.

또 큰 형이 아버지의 재산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둘째가 돌아왔는데 자기의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고 단지 아버지의 재산중에 살진 송아지를 그 동생을 위해 잡아준 것이 너무 화가난 것이다. 동생의 생명이 살진 송아지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온통 아버지의 재산에 집중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간섭과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떠나 자유롭게 혼자 자기 인생을 살아보기를 원하고 혼자서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둘째 아들이 가졌던 관심을 위해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나니 결국 그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없음을 때단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자기를 안아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는 아버지를 보고 다시금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되었고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함께하심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큰 아들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함께하심의 은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와 같이 살고는 있었지만 아버지가 갖고있는 재산에 관심이 있어 정말 아버지와 함께하는 은혜를 모른채 바로 방탕하게, 아버지의 재산을 생각할때마다 마음이 들떠 아버지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이 좋은지 어떤 은혜인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말에 31절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보다는 아버지의 함께하심을 바로 알면 아버지가 가진 것이 다 아들의 것으로, 자동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아버지와의 관계, 함께 거함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아버지가 가진 재산에 관심이 쏠려있는 큰 아들을 깨우쳐주신다.
또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 혼자 살려고 했으나
결국 아버지와 함께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것을 깨다고 돌아왔음을 아버지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어쩌면 큰 아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버지랑 함께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하심의 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에, 교회에 직분이 있다는 것에, 교회에서 거룩해 보여지는 것에, 아니 하나님이 주실 복에 관심이 있고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탕자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신앙의 삶이 근본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함께함으로 오는 것에 대한 관심, 교회생활로 얻어지는 것들, 교회의 직분을 가짐으로 받게되는 것에, 교회 봉사를 함으로 인정받게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안에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바로 탕자인 것이다.

주님, 우리가 탕자였습니다.  교회안에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품과 함께하심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하고 써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품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아버지의 품과 함께하심의 은혜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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