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3일 금요일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절호의 기회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왕,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을 통해 그가 가졌던 삶의 원칙과 신앙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않았나 생각이 든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는 왕이 되는 길은 너무나 길고 힘들며 목숨까지도 위협을 받는  험한 길이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24장 2절에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갈새" 다윗이 있는 곳으로 싸움에 능한 군인 삼천명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미친짓까지하면서 도망다니며 살던 다윗에게 이런 쫓기는 삶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를 주시는 일이 벌어졌다.

다윗과 같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다윗의 손에 넘기셨다며 뒤를 보고 있는 사울왕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24장4절)
그러나 결국 사울왕을 죽이지를 못하고 그의 옷자락 조금을 벤것마저도 마음에 찔려(5절) 괴로워했다.

그는 10절에 사울왕에게 소리높여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자기의 손에 넘기셨으나 12절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이려하는 사울왕을 자신의 손에 넘기시는 좋은 기회를 주셨고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인정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왕,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또 하나님께서 직접 치실 것이라며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손을 델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말은 상황적으로 기회인것 같지만, 사울왕을 죽여야 자신을 왕으로 삼으시고 기름을 부은 하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 같은 기회였지만 이 기회를 하나님의 뜻과 때를 믿고 자신의 손을 들어 사울왕을 죽일 수 가 없었다는 얘기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기회로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26장에 또 다시 한번 사울왕을 죽이고 다윗 자신이 이제는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었졌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광야로 내려갔을때 저녁때가 되어 모든 사람이 잠들었을때 아니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셨을때 12절"다윗이 사울의 머리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못하고 깨어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이라 말하고 있다.

이번에는 더 확실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면 않되는 것이다. 다윗이 이 기회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이 좋은 기회를 만드셨기때문에 어쩌면 사울왕을 죽여도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고, 평생 사울왕을 피해다니고 광야와 굴로 도망다녀야 하는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버리셧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 하나님의 인도이자 섭리라고 확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아비새도 8절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라고 말하고 있지않는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사울왕을 죽인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가 죽인 것이니 자신은 더더욱 떳떳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10-11절에"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자르르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하면서 사울왕이 자고 있는 자리 옆에 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하는 것 같은 상황이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알고 있었다. 이 기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인 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는 상황이 또 우리 앞에 펼쳐진 기회를 보고, 거기다 분명 명분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면 우리가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곤 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하나님께서 블레셋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신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싸워이기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하나님께 묻는 절차도 무시하고 제사도 자신이 드리는 영적 교만을 가지고 직접 행하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결국 겉으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앞에서 놓인 이 좋은 기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대로 왕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함으로 생각하지않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장21절-22절,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페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그리고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라는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짓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이런 좋은 기회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직접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것 이다.

바로 다윗이 그랬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40년간을 쫓아다닐때 도망다니는 신세로 힘들고 어려운 삶을 비록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그런 삶을 벗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사용하지않고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뤄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주님!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리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아래 기다리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과 기회를 보고 자신의 뜻을 이루는 어리석은 사울왕 같은 사람이 되지않게하여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은 분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가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마태복음 6장34절 - 개혁개정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지금까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내일 걱정은 내일하고 오늘은 오늘의 걱정으로 족하니 내일 일까지 신경 쓰지말아야한다고 이해해왔다.
이전 성경에도 "....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되어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개혁개정에는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번역한다.

깊이있게 집중해서 읽지않으면 같은 얘기인 것 같으나, 분명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 성경에도 내일 염려하라고 되어있지않고,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번역되어있다.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껏 내일 일에 오늘 염려하지말고 내일 염려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왔으나, 성경은 염려할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때 내일이라는 시간적 개념에 우리의 포커스를 맞추고 이 말씀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 내일 염려는 내일되면 염려해야하는 것처럼, 또 우리는 염려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날그날의 염려만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면서 살라고 하지않는다. 아니 믿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염려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우리가 어찌 염려하면서 살수 있겠는가? 그것도 염려를 하되 그날그날의 염려만하라는 말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일이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염려를 하지말라는데에, 또 우리의 염려는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떤 것에 염려를 해야하는지의 촛점과 포커스를 맞추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34절 이전 말씀인 33절에 우리가 다 알고 외우는 말씀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고 나서 바로 34절에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세상살이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을 보시고 염려하지말라고 하시면서 그것 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 먼저 해야할 일, 바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 즉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는데 걱정하며 염려하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필요한 부분들을 더해주시고,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또 염려할 이유가 없도록 해결해 주신다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일 일의 걱정은 내가, 우리가 아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염려할 것이라는 것이다.내일 이뤄져야할 주님의 뜻과 목적, 우리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할때 그 뜻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상살이의 걱정과 염려가 내일이라는 시간에 맞추어 알아서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염려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늘 이땅에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붙들고 고민하면서 살았다면 오늘의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는 이미 해결해 주셨고, 내일 또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되면 그 뜻을 이뤄가며 사는 내일의 삶속에 내일이라는 시간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것을 가지고 염려를 해왔고 내일 일에 대한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도 염려를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염려가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에 대한 염려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지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6장 32절이전에 보면 25절, "...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시면서 일상, 하루하루의 삶속에 세상적인 걱정과 염려에 대해서 30절, 믿음이 적은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염려하지말라고 설명을 하신뒤, 33절과 34절의 오늘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34절에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구하고 이뤄나가는 것이어야 되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여지껏 엉뚱한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하고 살았습니다. 이 땅에 저희를 보내실때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뤄나가는 삶을 살기위해 고민하고 그 뜻대로 살기위해 염려하는 삶을 살지못했습니다. 하루하루 또 그날그날의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뜻과 목적을 온전히 이뤄 나가시기를 염려하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9일 금요일

인내의 부족으로 드러난 진실치못한 겸손이 영적인 교만으로 변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

인내의 부족으로 드러난 진실치못한 겸손이 영적인 교만으로 변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왕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왕을 요구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시고 사무엘을 통해 기스의 아들 사울이라는 준수한 소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다.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9장 6절-7절에 아버지의 암나귀를 잃어버리자 아버지의 말씀대로 찾아다니다가 지쳐있을때 같이갔던 사환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가서 물어보자는 제의를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들이고,  사무엘앞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면서 21절에 자신은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사람이며, 모든 가족중에 가장 미약하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또한, 사무엘이 이스라엘 왕으로 제비를 뽑을때 이미 기름부움을 받았지않았느냐며, 왜 또 제비를 뽑냐며 항의를 할 수 있었지만 10장22절에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있었다. 제비를 뽑아 결국 사울이 왕으로 뽑혔으나 27절에 불량배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구원하겠느냐며 멸시할때도 그는 잠잠하였다고 말한다.

이미 왕으로 뽑힌 후에도 나이 40세가되어 공식적으로 왕으로 추대하기전까지도 11장6절에 밭에서 소를 몰고 있었다.

겸손해보이는 삶을 살았던 사울왕, 그런데 그 겸손함도 기다림, 인내가 부족하다보니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는 결과까지 가게되었다.

겸손, 너무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겸손이 진정한 겸손인지,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인지를 알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높이는데 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내며 기다리느냐,  인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만일 인내하지 못하는 겸손이라면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지만 영적 교만으로 사울과 같은 인생의 비참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에 오른지 이년이 된때에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한 것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많은 병거와 마병을 이끌고 올라오자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던 사울은 8절에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아나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절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7일안에 온다고 했던 시일이 됬는데로 오질않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 도망가는 이스라엘 군대를 보고 겁이 나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제사장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리고 만다. 그런데, 10절에 번제를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조금만 더기다렸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번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번제를 사무엘을 통해 드릴 수 있었는데 넘어서지 말아야 선을 넘어버리는 교만에 빠져버렸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번제를 드릴 자격이나 허락도 하지않은 일을 교만하게 자신이 하고만 것이다. 겸손하던 사울이 영적교만을 범하고 만 것이다.

사무엘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도 12절....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고 무책임한 답변을 하고만다. 겸손했던 사울의 대답으로는 전혀 맞지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영적교만에 빠져있는 사울에게 13절,14절에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꾸지르면서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그의 왕권을 다른사람에게 줄것을 얘기한다. 14절,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이제 왕이 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겸손했던 사울에게 너무나 가혹한 말씀을 하고 있다. 겸손했던 사울에게 인내가 없어 영적교만에 빠진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죄이었길래....

사울의 교만은 이것으로 끝나지않고,  14장19절에,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싸울때 제사장의 제사를 막으며 그만 두라고 저지를 한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하고"
다 끝나가고 있는데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다시 중단을 시키는 인내없는 행동으로 이런 또 망령된 영적 교만을 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교만이요, 자신을 죽이는 영적 교만인 것이다.

또한, 아말렉을 칠때 모든 생명을 멸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좋은 것을 남겨 제사를 드리려 한다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세움으로 영적교만의 최절정까지 가게된다.(15장21절/12절) 이에 11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세운 것까지도 후회하시는 일이 벌어졌다.

사무엘은 그 겸손하던 사울이 이런 인내없이 행한 영적 교만을 보고 안타까와하며, 17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라고 말을 하고 있다.

겸손했던 사울이 인내의 부족으로 영적교만을 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울의 겸손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겸손이었다. 하나님을 높이기위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위해 인간적인 겸손함이었다. 사울의 사환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기위해 제안을 했을때도 사울이 기름을 부을때도, 또 불량배가 멸시을 했을때도 왕으로 추대받을 때도 그는 그가 이루기를 원했던 이스라엘의 왕, 또한 적들을 자신의 손으로 물리치려했고 결국 자신의 기념비를 헤우는 자신을 내세우려했던 겸손이었다.

다시말해 그의 겸손은 목적달성에 촛점이 맞춰져있었다. 그러했기에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인내를 할 수 없엇던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이었다면 자신의 아들의 믿음의 고백인 14장6절 "...여호와의 구원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직접 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함을 알지못하고, 싸움의 승리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가면 이길 것 같아 자신의 손으로라도 제사를 드리고 승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승리를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는 커녕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명령에 불순종하는 겸손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왕위를 옮기신 것이다.

둘째, 그가 가졌던 겸손은 진실되지 못한 겸손이며, 진실되지 못한 겸손은 즉 영적 교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대적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다.  하나님을 높이는 진정한 겸손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은 바로 인내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높이기를 원하는 겸손은 하니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인내한다.
왜냐면 진정한 겸손의 촛점은 하나님을 높이는데 두기때문에 아무리 겸손해보여도 하나님이 높여지지않으면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신의 뜻을 내세울 수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사울과 같은 진실되지못한 겸손은 하나님를 높이는 목적보다는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한데 있었기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위해서는 영적인 교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가 없으며 인내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주님!, 우리는 남에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를 높이기위한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기위한 겸손, 아니 작게는 남들의 인정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겸손을 하곤 합니다. 이 잘못된 진실되지 못한 겸손을 버리게 하여주옵시고 진정한 겸손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진정한 겸손을 가질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몸소 아버지 하나님를 높이고 뜻을 이루기위해 겸손을 보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1년 9월 7일 수요일

믿음의 행위는 은밀하게할때 갚아주신다.

믿음의 행위는 은밀하게할때 갚아주신다.

마태복음 6장1절-18절에는 구제할때, 기도할때 또 금식할때 어떻게 해야할지를 가르쳐주고 계신다.
구제는 우리의 믿음의 외면적 실천이고 기도는 우리의 믿음의 존재 이유이며 금식은 믿음의 내면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 세가지의 믿음의 행위를 행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과연 어떻게 구제와 기도 또 금식을 해야할지를 말씀하시면서 이 믿음의 행위의 원칙을 1절에서 분명히 알려주신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주님을 위한 것이라며 명분을 내세운다. 주님을 위하고 주님때문에 한다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 깊이 들여다보면 어쩌면 우리의 의를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고 믿음의 행위를 한 적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렇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셨을지도... 왜냐면 우리의 죄성은 항상 우리를 잠시도 나두질 않기때문이다.

2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주님을 위함이라하면서 결국 자신의 의를 행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주는 상, 그 믿음의 행위를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 인정과 칭찬을 기대했던 바로 자기만족의 상.
결국 주님과 상관없는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했다는 말이다.

분명히 주님은 어떻게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는 방법에 대해 동일하게 같은 방법으로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4절,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하라...
6절, 너는 기도할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방법은 바로 "은밀하게" 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믿음의 행위인 구제, 기도와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을 너무 잘 아시기에 믿음의 행위를 행하고도 헛되지 않도록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다.

구제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면서 3절에 "너는 구제할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어찌 한 몸에 붙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해야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은혜와  감동으로 행한 구제가, 내가 언제 구제를 했지? 하고 모르도록, 또 기억속에서 지워져 생각이 나지않도록 아주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과연 우리는 은밀하게 하고 있는가?

기도도 아예 골방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어떤 기도를 하는지, 왜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도록 은밀하게 하라 말씀하신다.
교회에서 다 같이 기도할때 또 대표기도를 할때는 잘하는데 집에서 매일의 삶속에 기도하지않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없다면 혹 자신의 의를 행하는 기도는 아니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금식도 은밀하게 남이 보면 과연 저 사람이 금식을 하고 있는 건가 할 정도록, 아니 금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도록 하라고 하신다.

그럼, 왜 주님은 은밀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왜 은밀함을 좋아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는 주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께 촛점이 맞추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자꾸 사람의 관심과 시선을 의식하고, 우리에게는 주님께 촛점을 마추기보다는 사람에게 촛점이 맞추려는 죄성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주님께 맞춰져 있다면 오로지 주님과 단 둘이 조용히 또 은밀하게 주님 앞에서만 하면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주님께 촛점이 맞춰지기위해 또 믿음의 행위를 주님만이 받으시기위해서는 은밀한 가운데 해야되는 것이다.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가운데서 해야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관심, 시선과 인정을 무시한채 오직 주님께 촛점을 맞추고 집중해서 하는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 바로 은밀한 가운데서 행하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그때 주님은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 하신다.

4절,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절,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절,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서 은밀한 가운데서 한 구제,기도와 금식에 대해 상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고 갚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갚다"라는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빌리거나 꾼 것을 도로 돌려주다." 또는 "남에게 진 신세나
품게된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에 상당하게 돌려주다."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또 자꾸 그렇게 하려는 죄성을 물리치고 오직 주님께 집중하여 은밀하게 행함으로 포기하는 것들, 은밀하게 함으로 자기만족상을 받지못하고 홀로 주님앞에서만 행해지는 멋없고 초라해 보여지는 아니 사람들의 눈의 별 의미없어 보여지기까지하는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갚아주신다고 하는 것이다.

은밀하게 주님께만 촛점을 맞추어 행한 믿음의 행위로 인한 신세를 주님께서는 돌려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어찌 복된 말씀인가? 당연히 주님께만 집중해서 해야할 믿음의 행위를 했다고 사람들에게 받지못하고 자신의 자기만족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안쓰러움 마음으로 갚아주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다.

주님!, 더이상 사람들의 시선, 관심과 인정을 의식하지말고 은밀한 가운데서 믿음의 행위를 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님께 촛점을 맞추고 집중하여 당연히 해야할 은밀한 가운데서 행하게 하옵소서. 은밀한 중에서 보시고 갚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