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출16:13 만나는 진 주위에, 메추라기는 진에 덮으시고

예전에 출애굽기 성경공부를 하다 이 대목에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가장 적합하고 잘 맞는 방법으로 계획성 있게 일용할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에 큰 은혜를 받아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의 일상에도 섬세하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해 본다.

13절에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얼마나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인가?
아침에 이슬같이 진 주위에 내려주시는 만나, 광야에 먼지가 많은데다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사는 진에는
숨 쉴수도 없을 정도의 먼지로 어떠한 환경인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 다들 잠든 새벽에 사람의 움직임이없고 먼지 날리지 않는 조용한 아침에 만나를 이슬같이 내리시어 깨끗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만나를 먹이시려는 주님에 배려에 아니 놀랄 수 가 없다.
그것 뿐인가? 만나는 진 주위에, 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나 진 위에 또는 메추라기를 보내시듯 진에 덮으시지 않고 1/4로  나누어 2백만의 백성들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나누어 Caos가 생기지 않도록하시고, 또 모든 사람이 만나를 주으러 나가게 하지 않으시고 각 가족의 대표 한 사람이 나가 가족수대로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다. 만약 이런 세심한 배려 없었다면 2백만명이 우루루 나가 먼저 거두려는 사람, 늦게 도착한 사람과 엉키고 섞여 싸우고 제대로 거두지도 못하고 오히려 발에 밟히는 것이 정작 거두는 것 보다 많아 만나를 먹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매일 만나로 2백만명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계획성 있고 가장 현명하고 상황에 적합한 방법으로 내려주시고 먹이시는 배려에 한번 더 놀랐다.

메추라기는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하는 습관이 있으며, 날아다닐 수 있어 만나처럼 진 주위에 내시셨으면 메추라기를 잡느라 시간을 다보내고 결국 몇 마리 잡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을 우려하신 하나님이 저녁시간 그것도 식사시간에 가까이 진이 덮이도록 진안에 내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각각의 텐트 앞에 날아가지도 못하고 슆게 잡을 수 있도록 진안과 진 위에 덮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세심한 배려인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아주 세심하고 배려있게 또 계획성있게 배푸셨을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과연 우리의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나의 환경과 나의 형편과 나의 성격과 나의 취향과 나의 Style에 맞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우리가 접하는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너무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취향대로 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은 해보았는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로는 하면서 우리의 삶속에 이렇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계획성있게 우리에게 딱 맞게 영적, 육적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배가 불러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해서 내려주신 만나를 기름에 튀긴 단 과자로 하찮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제는 배고파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어놓고 이렇게까지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에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한번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너무 우리에게 딱 맞기에, 너무 우리의 생활에 편안하고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받기에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잊어 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주님, 저의 이 초라한 삶속에 함께하시어 제게 꼭 맞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내 환경에 맞게 제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일용할 육적, 영적인 양식을 먹여 주시는 주님을 모르고 제가 잘해서, 제가 원했기에 된 것처럼 감각없이 감사없이 지냈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의 세심하고 배려있는 공급과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요10장14절 ...서로 잘 알고 지내나?, 양의 문 아니면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에는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된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절에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문지기가 문을 열면 그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7절에는 문지기는 커녕 생명도 없는 나무로 된 문, 양의 문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다시 이르시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를 위해 생명도 없는 양들의 몸에 부딛치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지키고 버텨주는 문이라 말씀하신다"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기때문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하셨을까?

양들이 울타리안에서 보호받고 생명을 보존받기위해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와야 하기에 양의 문은 양들에게 생명의 문이요, 양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이기에 양의 문이기를 자청하신 것이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드러가면 구우너으 ㄹ받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들어온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울타리에 들어온 양이 살아가는데, 생명을 이어가기 충분한 것인가? 양의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다 끝인 것인가? 구원을 얻었다고 신앙이 자라가는가?

9월 하반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만,"...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하셨다. 문 안으로 들어온 양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속에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려면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문으로써의 예수님만을 믿고 바라봐서는 충분하지가 않는 것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가야 푸른 초원의 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매일의 삶 속에 꼴을 먹이시려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10절에 생명을 얻데하되 풍성한 매일 매일의 삶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을 주신 예수님,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써 구원받은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수님의 문으로 한번 들어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따라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꼴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가? 매일 매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예수님이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양의 문이셨던 예수님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에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알아야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계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재훈아! 오늘도 푸른 초장으로 나가 꼴을 먹으러 가자 하시는데 혹 나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그의 음성을 못 알아듣기에 따라나가질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 분의 음성을 듣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을 잘 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해 잘 알고 지내는지?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지내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알고 지내는 삶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떻게 알고 지내셨는가?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알고 지내는 것처럼하면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30절에 예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알고 지내시는 관계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되어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알듯이 잘아는 것같이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예수님의 음성이 어떠한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느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되고, 예수님의 관심이 내관심이 될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기에, 항상 듣는 예수님의 음성인지를 알기에 듣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때 나의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을 수 있기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됨을 38절에서는 ".... 아버지께서 내안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나가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할때 양의로써의 꼴을 먹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면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게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을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방향을, 방법을, 때를 알기에, 예수님의 바라는 바대로 구하기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한는대로 받게되며,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의 응답을 받지못하는가?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는 관계가 되어야한다.
서로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가 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낼 수 있는가?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것이다.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된 것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삶,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삶을 살때 비로써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성품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야한다...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하나되고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음성을 듣고 알아 오늘도, 내일도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을 따라 나가 꼴을 먹을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닮은 작은 예수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요9:1-11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방법으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인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제자들은 그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누구의 죄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는지 물을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뜩, 그 삶속에 주신 목적으로 주시고 이뤄가시기 위함이라 대답하신다.
태어날때부터 한번도 세상을 보지못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신 목적을 나타내시고 이루시기 위해 어렵고, 힘들고, 혹 불행하기 까지한 환경과 과정을 지나가게하신다고 믿고 있는가? 왜 내 삶은 불행합니까? 누구때문에 내가 이렇게 삽니까? 왜 나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까?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일이 계획한대로 되질 않습니까? 왜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우리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해 또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대답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이런 초라한 삶을 통해, 나의 이 불행한 삶을 통해, 나의 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이 삶을 통해 주님이 주님의 뜻을 이뤄가신다고요? 저의 이런 삶도 주님의 뜻에 사용된다고요? 이런 제 삶에도 주님의 목적을 심어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멸시하고 왕따를 하며 무시하지만, 주님은 뜻을 두시고 주님의 목적을 제 삶을 통해 이뤄나가신다니 제가 그리 중요합니까?라고 감사를 해야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방법으로 그 소경을 고치신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며 고치셨다.
그 더러운 방법으로 혐오감이 드는 방법으로 침과 진흙이 섞여 냄새나는 것으로 눈에 바르고 그대로 사람많은 길 거리로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7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라고 쓰여 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서 씻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퇴! 하고 침을 뱉으실때, 왜 더럽게 예수님 이런 방법으로 하심니까? 라고, 그 더럽고 냄시나는 것을 눈에 붙이고 사람 많은 거리를 지나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 하심니까?라고 반문하지 안았다. 많은 병자를 고치실때 말씀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느니라하면서 낫게되는 방법을 나두시고 이런 이해 안가는 방법으로 고치셨을까?

그 맹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두시고 그 분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그분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분의 뜻과 목적을 그분의 방법대로 이뤄가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가 싫다고? 더럽다고? 창피하다고? 원치 않다고? 그 방법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전적인 주님의 뜻과 방법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마음속에 역사가 있고 고침이 있고 나음이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너무좋은 것, 편안한 것에 습관되어있다. 힘들고, 어렵고, 피곤한 것을 원치않는다. 주님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불평할때가 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의 그 뜻을 이뤄가시는 방법에도 순종한다는 것이다.

주님, 저의 초라한 삶에 주님의 깊은 뜻을 두시고 목적을주셔서 이뤄가시는 주님의 모든 방법을 저의 생각, 습과 GUSTO, PREFERENCIA 에 관계없이 창피하고, 더럽고, 힘들고, 어렵더라고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옵소서.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요8:29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28절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 인줄 알고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 대답하시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가르치시고, 이런 일을 말하며 또 표적을 보이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시기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항상 함께 하심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일이 조금 생각대로 또는 계획대로 잘되어지면 자신이 한 것 같이, 자신이 기도해서, 자신의 믿음때문에 일이 잘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게된다. 또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며 자신의 하나님 앞에 무언가 열심이 또는 정성이 부족해서 일이 잘 않되는 것 처럼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노력이 있기때문이라하시지 않고,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고 절대로 혼자 두시지 않으셨기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같이 하셔서 감당할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때문에 순간,순간의 위기를 말씀(8장1절-11절 음행중에 잡혀온 여인의 경우)으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실때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삶에 순간 순간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는지? 나는 예수님처럼 나의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뤄나갈 수 있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갈때, 주님이 나를 혼자 두시지 않고 항상 같이 하셔서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 내 힘이 아니요, 내 노려과 정성이 아닌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때문에 감당할 수 있음을 고백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가? 예수님은 29절에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다. 항상, 언제든지, 모든 일에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결단코 단 1초라도 혼자두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매사에, 모든 일에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내 뜻, 내 기쁨, 내일을 위해서 일하고 노력하면서 주님께 도와달라면서 혼자 있음에 슬퍼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의 목적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의 전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그 함께하심이 그 일을 감당케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이 함께하심의 은혜속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기쁨이 아닌 나의 삶의 뜻과 목적이 아닌 주님의 뜻과 목적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저 또한 주님따라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내 기쁨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께 함께해달라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지 말게하시고 제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모든 일에, 매사에, 순간에 할 수 있게하시어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의 능력을 체험케하여 주옵소서.

2010년 11월 4일 목요일

눅 24:5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절,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올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녀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 옮겨지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고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요 전능자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경속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자꾸 찾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이미 무덤에서 살아나 나오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했고 죽은 예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큰 은혜가 넘치지를 않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까?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까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에서 만 예수님을 찾고 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초라한 삶과 생활의 현실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힘이들고 지치고 능력이 없고 피곤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5절에 하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어찌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 나와 시간시간, 아닌 매 초마다 함께 해주시는 그분을 죽은 신 것같이 무덤에서 성경안데 갇히신 것처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을 깨닫게 하시기위해 하신 말씀이 또한 6절과 8절에 살아계셨을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살미 힘들고 지칠때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이 느껴지고 이 험학한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이 생각될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입니다. 성경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고 나를 한번도 혼자두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었던 때를 기억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었던 때를 기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의 감격을, 은혜를 되살려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다면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는 나 혼자 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것 같이 주님은 성경속에나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혼자 눈물로 내 삶을 한탄하며 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항상 제 곁에 계셨고 제 삶속에 살아서 저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을 되살리고 받았던 은혜를 기억해 볼때 분명히 그때 살아계셨고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도, 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