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거부 록펠러는 세가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선의 기록' 입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둘째는 '인생역전의 기록' 입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첫사랑에게 가능성이 없는 가난뱅이로 취급받으며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방을 자극제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로 우뚝 섰습니다.
셋째는 ' 장수의 기록' 입니다.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습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치아와 위장이 건강했다고 합니다. 록펠러가 3대 기적을 창출해 낸 원동력도 세가지 입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 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경건한 생활' 입니다. 그는 한 번도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셋째는 '성경 묵상' 입니다. 아흔 살이 넘어 시력이 약해지자 그는 사람을 고용해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귀로 성경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주님을 따라 살려는 모든 중앙 청년들에게.....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패니 회장의 문제 해결 철학
"긍정적인 사고"로 널리 알려진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이 백화점 업계의 대부 J.C. 패니를 만나 뉴욕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회장님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겪으셨을텐데, 회장님의 문제 해결 철학은 무엇입니까?"
패니의 답변은 신앙의 인물로서 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목사님, 사실 저는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부터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할 때마다 제가 더욱 강해지고, 앞으로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준비를 갖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발판으로 더욱 성장하는 것을 믿기때문이지요. 그러니 감사부터 하는 게 당연합니다."
벼룩으로 인한 감사
<피난처>를 쓴 코리텐 붐 여사느 유내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어니 베시와 함께 나치수용소에 감금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갇혀있는 중에도 어렵게 성경책을 구해 날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말씀 가운데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을 깊이 새겨둔 그녀는 얼마후 언니 베시와 더 열악한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최악이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벼룩까지 들끓어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습니다. 언니 베시는 이런 비참한 환경까지도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베시가 눈을 감고 나지막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코리는 할 수 없이 "아멘"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그녀는 벼룩으로 인해 감방 주위에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하지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자유롭게 성경을 읽으며 교제를 나눌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세 종류의 감사
첫째는 만일(if)의 감사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소원을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조건부 감사를 말합니다.
둘째는 때문에(Because)감사합니다.
과거를 가만히 돌이켜 보고 좋았던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취직이 되어서 감사합니다, 병을 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마 이런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도 드뭅니다. 모두가 자기가 잘나서 축복받은
줄 알고 때문에 감사 조차 고백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이런 때문에 감사를 뛰어넘어 다음 단계의 감사까지 가야합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합니다.
내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병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을때 자족할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일 큰 능력
감사는 결국 선택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불평은 사탄을 기쁘게 만듭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듯이고 불평은 사탄의 뜻입니다.
감사를 택하든 불평을 택하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결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환경에서도 감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삶은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불평하기도 작정한 사람의 인생은 피곤하고 고독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얼굴빛을 평온하게 만들지만, 불평은 우리의 얼굴빛을
짜증스럽게 만듭니다.
능력중에 제일 큰 능력은 감사하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
감사의 시작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감사하는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이 되고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도 행복해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처한 특수 상태,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여러가지
선물을 주의 깊게 그리고 세심하게 하나씩 주목하는 데 달려있다.
그럼으러써 우리의 온 삶은 감사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과 평온과
평강으로 충만해진다. - H.E.매닝.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출16:13 만나는 진 주위에, 메추라기는 진에 덮으시고
예전에 출애굽기 성경공부를 하다 이 대목에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가장 적합하고 잘 맞는 방법으로 계획성 있게 일용할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에 큰 은혜를 받아 다시 묵상하면서 우리의 일상에도 섬세하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생각해 본다.
13절에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얼마나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인가?
아침에 이슬같이 진 주위에 내려주시는 만나, 광야에 먼지가 많은데다 2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 사는 진에는
숨 쉴수도 없을 정도의 먼지로 어떠한 환경인지를 잘 아시는 주님이 다들 잠든 새벽에 사람의 움직임이없고 먼지 날리지 않는 조용한 아침에 만나를 이슬같이 내리시어 깨끗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만나를 먹이시려는 주님에 배려에 아니 놀랄 수 가 없다.
그것 뿐인가? 만나는 진 주위에, 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내리셨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나 진 위에 또는 메추라기를 보내시듯 진에 덮으시지 않고 1/4로 나누어 2백만의 백성들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나누어 Caos가 생기지 않도록하시고, 또 모든 사람이 만나를 주으러 나가게 하지 않으시고 각 가족의 대표 한 사람이 나가 가족수대로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다. 만약 이런 세심한 배려 없었다면 2백만명이 우루루 나가 먼저 거두려는 사람, 늦게 도착한 사람과 엉키고 섞여 싸우고 제대로 거두지도 못하고 오히려 발에 밟히는 것이 정작 거두는 것 보다 많아 만나를 먹어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매일 만나로 2백만명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계획성 있고 가장 현명하고 상황에 적합한 방법으로 내려주시고 먹이시는 배려에 한번 더 놀랐다.
메추라기는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는 생활하는 습관이 있으며, 날아다닐 수 있어 만나처럼 진 주위에 내시셨으면 메추라기를 잡느라 시간을 다보내고 결국 몇 마리 잡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을 우려하신 하나님이 저녁시간 그것도 식사시간에 가까이 진이 덮이도록 진안에 내려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각각의 텐트 앞에 날아가지도 못하고 슆게 잡을 수 있도록 진안과 진 위에 덮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세심한 배려인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아주 세심하고 배려있게 또 계획성있게 배푸셨을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과연 우리의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나의 환경과 나의 형편과 나의 성격과 나의 취향과 나의 Style에 맞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우리가 접하는 육적, 영적 일용할 양식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너무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취향대로 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은 해보았는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로는 하면서 우리의 삶속에 이렇게 세심하고 배려있게, 계획성있게 우리에게 딱 맞게 영적, 육적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배가 불러 그렇게 세심하게 배려해서 내려주신 만나를 기름에 튀긴 단 과자로 하찮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언제는 배고파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울부짖어놓고 이렇게까지 세심한 하나님의 배려에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한번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너무 우리에게 딱 맞기에, 너무 우리의 생활에 편안하고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받기에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잊어 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기도해 본다.
주님, 저의 이 초라한 삶속에 함께하시어 제게 꼭 맞고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내 환경에 맞게 제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일용할 육적, 영적인 양식을 먹여 주시는 주님을 모르고 제가 잘해서, 제가 원했기에 된 것처럼 감각없이 감사없이 지냈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의 세심하고 배려있는 공급과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요10장14절 ...서로 잘 알고 지내나?, 양의 문 아니면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장에는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된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2절에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문지기가 문을 열면 그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7절에는 문지기는 커녕 생명도 없는 나무로 된 문, 양의 문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다시 이르시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를 위해 생명도 없는 양들의 몸에 부딛치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지키고 버텨주는 문이라 말씀하신다"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기때문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하셨을까?
양들이 울타리안에서 보호받고 생명을 보존받기위해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와야 하기에 양의 문은 양들에게 생명의 문이요, 양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이기에 양의 문이기를 자청하신 것이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드러가면 구우너으 ㄹ받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들어온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울타리에 들어온 양이 살아가는데, 생명을 이어가기 충분한 것인가? 양의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다 끝인 것인가? 구원을 얻었다고 신앙이 자라가는가?
9월 하반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만,"...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하셨다. 문 안으로 들어온 양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속에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려면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문으로써의 예수님만을 믿고 바라봐서는 충분하지가 않는 것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가야 푸른 초원의 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매일의 삶 속에 꼴을 먹이시려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10절에 생명을 얻데하되 풍성한 매일 매일의 삶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을 주신 예수님,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써 구원받은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수님의 문으로 한번 들어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따라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꼴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가? 매일 매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예수님이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양의 문이셨던 예수님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에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알아야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계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재훈아! 오늘도 푸른 초장으로 나가 꼴을 먹으러 가자 하시는데 혹 나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그의 음성을 못 알아듣기에 따라나가질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 분의 음성을 듣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을 잘 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해 잘 알고 지내는지?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지내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알고 지내는 삶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떻게 알고 지내셨는가?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알고 지내는 것처럼하면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30절에 예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알고 지내시는 관계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되어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알듯이 잘아는 것같이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예수님의 음성이 어떠한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느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되고, 예수님의 관심이 내관심이 될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기에, 항상 듣는 예수님의 음성인지를 알기에 듣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때 나의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을 수 있기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됨을 38절에서는 ".... 아버지께서 내안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나가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할때 양의로써의 꼴을 먹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면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게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을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방향을, 방법을, 때를 알기에, 예수님의 바라는 바대로 구하기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한는대로 받게되며,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의 응답을 받지못하는가?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는 관계가 되어야한다.
서로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가 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낼 수 있는가?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것이다.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된 것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삶,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삶을 살때 비로써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성품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야한다...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하나되고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음성을 듣고 알아 오늘도, 내일도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을 따라 나가 꼴을 먹을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닮은 작은 예수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2절에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이 문지기가 문을 열면 그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7절에는 문지기는 커녕 생명도 없는 나무로 된 문, 양의 문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다시 이르시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를 위해 생명도 없는 양들의 몸에 부딛치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지키고 버텨주는 문이라 말씀하신다"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하기때문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하셨을까?
양들이 울타리안에서 보호받고 생명을 보존받기위해서는 양의 문으로 들어와야 하기에 양의 문은 양들에게 생명의 문이요, 양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이기에 양의 문이기를 자청하신 것이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드러가면 구우너으 ㄹ받고..."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들어온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울타리에 들어온 양이 살아가는데, 생명을 이어가기 충분한 것인가? 양의 문안으로만 들어오면 다 끝인 것인가? 구원을 얻었다고 신앙이 자라가는가?
9월 하반절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만,"...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 하셨다. 문 안으로 들어온 양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매일 매일의 삶속에 꼴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려면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문으로써의 예수님만을 믿고 바라봐서는 충분하지가 않는 것이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나가야 푸른 초원의 꼴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매일의 삶 속에 꼴을 먹이시려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10절에 생명을 얻데하되 풍성한 매일 매일의 삶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믿고 있지는 않는지? 구원을 주신 예수님,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만...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써 구원받은 양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데 언제까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인지?
혹시 우리가 예수님의 문으로 한번 들어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따라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꼴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가? 매일 매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예수님이 각각의 이름을 부르실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양의 문이셨던 예수님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4절에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알아야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계셔서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재훈아! 오늘도 푸른 초장으로 나가 꼴을 먹으러 가자 하시는데 혹 나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그의 음성을 못 알아듣기에 따라나가질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 분의 음성을 듣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을 잘 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대해 잘 알고 지내는지?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지내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알고 지내는 삶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떻게 알고 지내셨는가?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알고 지내는 것처럼하면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30절에 예수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알고 지내시는 관계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설명하셨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되어 서로가 서로를 자신을 알듯이 잘아는 것같이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예수님의 음성이 어떠한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어느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되고, 예수님의 관심이 내관심이 될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음성을 알기에, 항상 듣는 예수님의 음성인지를 알기에 듣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때 나의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매일 매일 주님이 주시는 꼴을 먹을 수 있기에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됨을 38절에서는 ".... 아버지께서 내안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나가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할때 양의로써의 꼴을 먹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7절에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내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면 예수님의 원하시는 바를 알게되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을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방향을, 방법을, 때를 알기에, 예수님의 바라는 바대로 구하기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한는대로 받게되며,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들의 응답을 받지못하는가?
먼저 우리는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내는 관계가 되어야한다.
서로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가 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과 잘 알고 지낼 수 있는가?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것이다.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된 것 같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는 삶,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삶, 예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삶을 살때 비로써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성품을 바꿔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야한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야한다...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주님! 예수님을 잘 알고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하나되고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실때 음성을 듣고 알아 오늘도, 내일도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을 따라 나가 꼴을 먹을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주님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닮은 작은 예수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요9:1-11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방법으로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맹인인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제자들은 그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누구의 죄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는지 물을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뜩, 그 삶속에 주신 목적으로 주시고 이뤄가시기 위함이라 대답하신다.
태어날때부터 한번도 세상을 보지못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신 목적을 나타내시고 이루시기 위해 어렵고, 힘들고, 혹 불행하기 까지한 환경과 과정을 지나가게하신다고 믿고 있는가? 왜 내 삶은 불행합니까? 누구때문에 내가 이렇게 삽니까? 왜 나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까?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일이 계획한대로 되질 않습니까? 왜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우리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해 또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대답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이런 초라한 삶을 통해, 나의 이 불행한 삶을 통해, 나의 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이 삶을 통해 주님이 주님의 뜻을 이뤄가신다고요? 저의 이런 삶도 주님의 뜻에 사용된다고요? 이런 제 삶에도 주님의 목적을 심어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멸시하고 왕따를 하며 무시하지만, 주님은 뜻을 두시고 주님의 목적을 제 삶을 통해 이뤄나가신다니 제가 그리 중요합니까?라고 감사를 해야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방법으로 그 소경을 고치신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며 고치셨다.
그 더러운 방법으로 혐오감이 드는 방법으로 침과 진흙이 섞여 냄새나는 것으로 눈에 바르고 그대로 사람많은 길 거리로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7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라고 쓰여 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서 씻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퇴! 하고 침을 뱉으실때, 왜 더럽게 예수님 이런 방법으로 하심니까? 라고, 그 더럽고 냄시나는 것을 눈에 붙이고 사람 많은 거리를 지나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 하심니까?라고 반문하지 안았다. 많은 병자를 고치실때 말씀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느니라하면서 낫게되는 방법을 나두시고 이런 이해 안가는 방법으로 고치셨을까?
그 맹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두시고 그 분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그분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분의 뜻과 목적을 그분의 방법대로 이뤄가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가 싫다고? 더럽다고? 창피하다고? 원치 않다고? 그 방법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전적인 주님의 뜻과 방법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마음속에 역사가 있고 고침이 있고 나음이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너무좋은 것, 편안한 것에 습관되어있다. 힘들고, 어렵고, 피곤한 것을 원치않는다. 주님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불평할때가 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의 그 뜻을 이뤄가시는 방법에도 순종한다는 것이다.
주님, 저의 초라한 삶에 주님의 깊은 뜻을 두시고 목적을주셔서 이뤄가시는 주님의 모든 방법을 저의 생각, 습과 GUSTO, PREFERENCIA 에 관계없이 창피하고, 더럽고, 힘들고, 어렵더라고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옵소서.
태어날때부터 한번도 세상을 보지못한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신 목적을 나타내시고 이루시기 위해 어렵고, 힘들고, 혹 불행하기 까지한 환경과 과정을 지나가게하신다고 믿고 있는가? 왜 내 삶은 불행합니까? 누구때문에 내가 이렇게 삽니까? 왜 나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겁니까?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일이 계획한대로 되질 않습니까? 왜 나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우리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나타내시기 위해 또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대답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이런 초라한 삶을 통해, 나의 이 불행한 삶을 통해, 나의 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런 이 삶을 통해 주님이 주님의 뜻을 이뤄가신다고요? 저의 이런 삶도 주님의 뜻에 사용된다고요? 이런 제 삶에도 주님의 목적을 심어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사람들은 멸시하고 왕따를 하며 무시하지만, 주님은 뜻을 두시고 주님의 목적을 제 삶을 통해 이뤄나가신다니 제가 그리 중요합니까?라고 감사를 해야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방법으로 그 소경을 고치신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시며 고치셨다.
그 더러운 방법으로 혐오감이 드는 방법으로 침과 진흙이 섞여 냄새나는 것으로 눈에 바르고 그대로 사람많은 길 거리로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7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라고 쓰여 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서 씻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퇴! 하고 침을 뱉으실때, 왜 더럽게 예수님 이런 방법으로 하심니까? 라고, 그 더럽고 냄시나는 것을 눈에 붙이고 사람 많은 거리를 지나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 하심니까?라고 반문하지 안았다. 많은 병자를 고치실때 말씀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느니라하면서 낫게되는 방법을 나두시고 이런 이해 안가는 방법으로 고치셨을까?
그 맹인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두시고 그 분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그분을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분의 뜻과 목적을 그분의 방법대로 이뤄가시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내가 싫다고? 더럽다고? 창피하다고? 원치 않다고? 그 방법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전적인 주님의 뜻과 방법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마음속에 역사가 있고 고침이 있고 나음이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너무좋은 것, 편안한 것에 습관되어있다. 힘들고, 어렵고, 피곤한 것을 원치않는다. 주님의 목적을 이뤄가시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불평할때가 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의 그 뜻을 이뤄가시는 방법에도 순종한다는 것이다.
주님, 저의 초라한 삶에 주님의 깊은 뜻을 두시고 목적을주셔서 이뤄가시는 주님의 모든 방법을 저의 생각, 습과 GUSTO, PREFERENCIA 에 관계없이 창피하고, 더럽고, 힘들고, 어렵더라고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게 하옵소서.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요8:29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자신을 소개하기를 28절에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야 내가 그 인줄 알고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 대답하시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가르치시고, 이런 일을 말하며 또 표적을 보이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시기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항상 함께 하심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일이 조금 생각대로 또는 계획대로 잘되어지면 자신이 한 것 같이, 자신이 기도해서, 자신의 믿음때문에 일이 잘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게된다. 또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며 자신의 하나님 앞에 무언가 열심이 또는 정성이 부족해서 일이 잘 않되는 것 처럼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노력이 있기때문이라하시지 않고,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고 절대로 혼자 두시지 않으셨기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같이 하셔서 감당할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때문에 순간,순간의 위기를 말씀(8장1절-11절 음행중에 잡혀온 여인의 경우)으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실때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삶에 순간 순간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는지? 나는 예수님처럼 나의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뤄나갈 수 있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갈때, 주님이 나를 혼자 두시지 않고 항상 같이 하셔서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 내 힘이 아니요, 내 노려과 정성이 아닌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때문에 감당할 수 있음을 고백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가? 예수님은 29절에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다. 항상, 언제든지, 모든 일에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결단코 단 1초라도 혼자두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매사에, 모든 일에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내 뜻, 내 기쁨, 내일을 위해서 일하고 노력하면서 주님께 도와달라면서 혼자 있음에 슬퍼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의 목적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의 전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그 함께하심이 그 일을 감당케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이 함께하심의 은혜속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기쁨이 아닌 나의 삶의 뜻과 목적이 아닌 주님의 뜻과 목적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저 또한 주님따라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내 기쁨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께 함께해달라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지 말게하시고 제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모든 일에, 매사에, 순간에 할 수 있게하시어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의 능력을 체험케하여 주옵소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가르치시고, 이런 일을 말하며 또 표적을 보이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하시기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항상 함께 하심의 능력으로 가르치시고,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일이 조금 생각대로 또는 계획대로 잘되어지면 자신이 한 것 같이, 자신이 기도해서, 자신의 믿음때문에 일이 잘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게된다. 또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하며 자신의 하나님 앞에 무언가 열심이 또는 정성이 부족해서 일이 잘 않되는 것 처럼 생각을 한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과 노력이 있기때문이라하시지 않고,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시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고 절대로 혼자 두시지 않으셨기때문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항상 같이 하셔서 감당할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때문에 순간,순간의 위기를 말씀(8장1절-11절 음행중에 잡혀온 여인의 경우)으로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마지막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실때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나의 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삶에 순간 순간마다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는지? 나는 예수님처럼 나의 삶에 주신 뜻과 목적을 이뤄나갈 수 있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주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갈때, 주님이 나를 혼자 두시지 않고 항상 같이 하셔서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 내 힘이 아니요, 내 노려과 정성이 아닌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때문에 감당할 수 있음을 고백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가? 예수님은 29절에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신다. 항상, 언제든지, 모든 일에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결단코 단 1초라도 혼자두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과연 매사에, 모든 일에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내 뜻, 내 기쁨, 내일을 위해서 일하고 노력하면서 주님께 도와달라면서 혼자 있음에 슬퍼하고 있는지?
예수님이 그분의 일을 이 땅에서의 목적을 다 이루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의 전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그 함께하심이 그 일을 감당케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주님이 함께하심의 은혜속에 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기쁨이 아닌 나의 삶의 뜻과 목적이 아닌 주님의 뜻과 목적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저 또한 주님따라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내 기쁨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께 함께해달라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지 말게하시고 제 삶에 주신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모든 일에, 매사에, 순간에 할 수 있게하시어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함께하심의 능력을 체험케하여 주옵소서.
2010년 11월 4일 목요일
눅 24:5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절,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올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녀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 옮겨지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고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요 전능자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경속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자꾸 찾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이미 무덤에서 살아나 나오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했고 죽은 예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큰 은혜가 넘치지를 않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까?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까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에서 만 예수님을 찾고 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초라한 삶과 생활의 현실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힘이들고 지치고 능력이 없고 피곤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5절에 하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어찌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 나와 시간시간, 아닌 매 초마다 함께 해주시는 그분을 죽은 신 것같이 무덤에서 성경안데 갇히신 것처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을 깨닫게 하시기위해 하신 말씀이 또한 6절과 8절에 살아계셨을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살미 힘들고 지칠때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이 느껴지고 이 험학한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이 생각될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입니다. 성경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고 나를 한번도 혼자두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었던 때를 기억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었던 때를 기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의 감격을, 은혜를 되살려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다면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는 나 혼자 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것 같이 주님은 성경속에나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혼자 눈물로 내 삶을 한탄하며 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항상 제 곁에 계셨고 제 삶속에 살아서 저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을 되살리고 받았던 은혜를 기억해 볼때 분명히 그때 살아계셨고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도, 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녀들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이 옮겨지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보고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요 전능자요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성경속에 갇혀있는 예수님을 자꾸 찾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처럼 이미 무덤에서 살아나 나오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했고 죽은 예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에 능력이 없고 큰 은혜가 넘치지를 않고 예수님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까?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아직까지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에서 만 예수님을 찾고 있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초라한 삶과 생활의 현실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 살아계신 예수님,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은 힘이들고 지치고 능력이 없고 피곤한 것입니다.
이런 여인들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5절에 하는 말씀이 바로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어찌 살아계신 능력의 예수님, 나와 시간시간, 아닌 매 초마다 함께 해주시는 그분을 죽은 신 것같이 무덤에서 성경안데 갇히신 것처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들을 깨닫게 하시기위해 하신 말씀이 또한 6절과 8절에 살아계셨을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살미 힘들고 지칠때 예수님이 죽으신 것 같이 느껴지고 이 험학한 세상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이 생각될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입니다. 성경속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찾아,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고 나를 한번도 혼자두시지 않으시고 함께하신 그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은혜받었던 때를 기억하고, 말씀에 감동을 받었던 때를 기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찾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전의 감격을, 은혜를 되살려 나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다면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는 나 혼자 이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것 같이 주님은 성경속에나 계시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혼자 눈물로 내 삶을 한탄하며 살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항상 제 곁에 계셨고 제 삶속에 살아서 저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전의 그 감격을 되살리고 받았던 은혜를 기억해 볼때 분명히 그때 살아계셨고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도, 또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2010년 10월 31일 일요일
눅 10장 38절-42절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앞으로 12월 첫주까지 성경공부가 없고 부서모임을 갖는다 하네요.
Qué pena, alguién se alegra? 난 조금 걱정이 되는데...
누가복음 10장39절-42절
39절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41절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청소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고, 정리도 하고, Mesa를 치우고
너무 준비할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정신없이 바쁨) 하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안자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듣고 있었다.
마르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지만 너무 많은 일로 바빠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놓치고 있는 그녀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시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가장 소중한 한 가지, 매일 오시지 않는 예수님이 어렵고 찾아
오신 그날에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일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일 한가지를 택하였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빼앗기지 안는다 하셨다.
교회도 어수선하고 2010년도를 마치고 2011년도 맞이하는 이 어지러운 이 시기에 과연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것인가? 현재 청년부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을때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한가지
현재 이 싯점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택하여 하라고 하시면 예수님을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닐까?
그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다면 마르다가 아무리
예수님께 40절 마리아에게 도와주라 얘기해달라며 불평하더라도 마리아가 결코 빼앗기지
않기위해 예수님의 발아래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듣고 나누고 은혜받는 이
일 한가지, 가장 중요한 이 일을 붙들고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되지 않은지?
청년부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청년부가 말씀을 사모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예수님 닮아가는
이 삶에서 말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리아처럼 행동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조원들이라도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붙들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아들과 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따라 블로그(prosenor.blogspot.com)에 은혜 받은 말씀들을 올리니 같이 은혜받고 또
여러분들이 은혜받은 말씀들도 올려주기를 바래요.
11월 한달 이렇게라도 말씀을 나누고 같이 은혜받기를 원해요.
12월이 되면 간사들이 직접 여러분과 성경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나, 모양이라도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 나누는 여러분의 축복된 삶을
위하여 기도하며,
이재훈간사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눅22:51 이것까지 참으라
누가복음 22장에서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시기 위해 마지막 제자들과의 유월절을 보내시고, 감람산에 습관대로 가셔서 땀 방울이 피 방울이되도록 기도하시고 난뒤 유다의 배반으로 결국 잡히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한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를 피해가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복종하고 이에 순순히 따르기로 하셨다.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인간적인 마음의 뜻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의 원함을 참고 내려놓겠다고 결정하셨다.
52절에, 감란산에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 성전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자신이 무슨 강도인 것처럼 강도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것 까지도 참으신 것이다.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악한 죄인으로써 전락하는 이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이 때에 예수님을 강도 취급하며 잡아가려는 이 방법까지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이일까지도 참고 받아드리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강도를 잡듯이 다가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트리자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까지 참으라"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하려하는데 그들의 방법이 너무 인간적이고 내 자신이 오히려 나쁜사람인 것 같이 대하고 사람들에게 떠들어데는 이 비열한 방법까지도 참고 받아드려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이것까지, 가장 견디기 힘든, 진실이 가려지고 나를 강도로 죄인으로 몰아가는 이 악랄한 방법까지도 참아야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까지도 참으셨기에 63절이후 부터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고, 욕하고, 채찍질하고, 침을 뱉어도 참을 수 있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기에 그의 뜻을 이뤄가는 방법에도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하면서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방법에는 불만이 많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고집하는 말만 주님의 뜻을 외치며 그분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뜻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면 그 분의 뜻을 이뤄가시는 방법도 인정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이 먼저 실천해 보이신대로 우리도 따라 해야된느 것이다.
주님!,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방법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그래서 이것까지 참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힘주시고 도와 주시옵소서.
2010년 10월 18일 월요일
눅19장1절-10절 삭개오가 보기를 원함
삭개오의 정체성, 그는 누구인가로 소개한다. 2절에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 열등의식 불만까지도 가지고 있던 차에, 그럼 예수님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원함. 3절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과연 그의 정체성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자하여 보러 나갔으나 키가 작아 자기 앞으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냥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겠지라고 순간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다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마음이 컸던지라 자신의 앞을 지나친 예수님을 다시 보기 위해 3절에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가 나무에 올가간다.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앞쪽으로 달려가서(1), 나무위로 올라(2)갔다. 2개의 행동, 동사가 나오는데, 그의 적극성, 간절함이 표현되었다. 혹시나 또 지나칠까봐, 용기를 내어 달려가서, 체면에, 나이에 부끄러울 수 있었지만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보기를 원할까? 살아계신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지... 1절에서 6절까지 보다라는 동사가 4번이나 나온다,, 그만큼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사람의 눈을 의식한 삭개오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설명한다.
보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달려가서 올라가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토록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 그러나 정작 그자리를 지나가시던 주님이 먼저 쳐다 보시고(5절)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는 제의를 하심으로 초청을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을 단지 보기를 소원하고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 에수님은 보는 것으로써의 만남이 아닌 그를 영접케하시고 함께하심을 은헤를 주셨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의 초청에 즐거이 영접하는 삭개오, 그의 마음이 변했다. 사람의 시선에 가장 민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재산을 주님을 영접한 뒤에는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했는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드리고 영접함으로...
우리 하루 하루의 삶속에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러기 위해 행동하고 그를 내 삶에 현실속에 영접하고 들어오시고 같이 식사하시고 유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 오늘도 제 초라하고 볼품없는 제 삶에 현실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달려갑니다. 올라갑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해주옵소서.
그냥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겠지라고 순간 생각을 했을지 모르나 다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마음이 컸던지라 자신의 앞을 지나친 예수님을 다시 보기 위해 3절에 앞으로 달려가서 돌무화가 나무에 올가간다.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앞쪽으로 달려가서(1), 나무위로 올라(2)갔다. 2개의 행동, 동사가 나오는데, 그의 적극성, 간절함이 표현되었다. 혹시나 또 지나칠까봐, 용기를 내어 달려가서, 체면에, 나이에 부끄러울 수 있었지만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보기를 원할까? 살아계신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지... 1절에서 6절까지 보다라는 동사가 4번이나 나온다,, 그만큼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사람의 눈을 의식한 삭개오의 정체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설명한다.
보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달려가서 올라가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토록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 그러나 정작 그자리를 지나가시던 주님이 먼저 쳐다 보시고(5절)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는 제의를 하심으로 초청을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을 단지 보기를 소원하고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보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 에수님은 보는 것으로써의 만남이 아닌 그를 영접케하시고 함께하심을 은헤를 주셨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의 초청에 즐거이 영접하는 삭개오, 그의 마음이 변했다. 사람의 시선에 가장 민감했고 자신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재산을 주님을 영접한 뒤에는 나눠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했는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드리고 영접함으로...
우리 하루 하루의 삶속에 주님을 보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러기 위해 행동하고 그를 내 삶에 현실속에 영접하고 들어오시고 같이 식사하시고 유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 오늘도 제 초라하고 볼품없는 제 삶에 현실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달려갑니다. 올라갑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해주옵소서.
2010년 10월 5일 화요일
누가복음 15장 - 잃었던 것을 찾음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비유하여 잃었던 것은 찾는다고 비유하심.
4절에 잃은 양을 찾다, 8절 잃은 드라크마을 찾다. 그러면서 7절과 10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면... 회개는 찾는 것이다, 다시 그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로써의 칭의받은 의인으로써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잃어버린 신앙, 양심, 믿음, 진실 그자리에서 잘못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리를 찾아 오는 것이 회개다. 비록 잠시 잃어버린 양처럼 드라크마처럼 죄를 짓고 원래의 자리에서 잃어버린바 된 현실에서 자시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11절에 다시 탕자의 비유을 들으시면서 18절에 탕자가 자신을 잘못을 깨닫고 잃어버린 아들의 자리를 한탄하면서 그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자신은 아들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도 않했으나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자 아버지의 아들로써의 자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갈 수 없지만 현재의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를 찾아 갈때 하나님이 자녀로써의 본래 자리로 회복 시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주님 이죄인 이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 믿음의 자리를 찾아 갑니다. 죄의 고백과 진정한 회개를 하오니 받아주시고 제자리를 회복시켜주시옵소서.
4절에 잃은 양을 찾다, 8절 잃은 드라크마을 찾다. 그러면서 7절과 10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한사람이 회개하면... 회개는 찾는 것이다, 다시 그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로써의 칭의받은 의인으로써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잃어버린 신앙, 양심, 믿음, 진실 그자리에서 잘못을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리를 찾아 오는 것이 회개다. 비록 잠시 잃어버린 양처럼 드라크마처럼 죄를 짓고 원래의 자리에서 잃어버린바 된 현실에서 자시 제자리로 찾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11절에 다시 탕자의 비유을 들으시면서 18절에 탕자가 자신을 잘못을 깨닫고 잃어버린 아들의 자리를 한탄하면서 그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자신은 아들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도 않했으나 원래의 자리로 찾아 돌아가자 아버지의 아들로써의 자리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갈 수 없지만 현재의 자리를 떠나 원래의 자리를 찾아 갈때 하나님이 자녀로써의 본래 자리로 회복 시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주님 이죄인 이죄의 자리에서 일어나 본래의 믿음의 자리를 찾아 갑니다. 죄의 고백과 진정한 회개를 하오니 받아주시고 제자리를 회복시켜주시옵소서.
2010년 9월 8일 수요일
마가복음- 예수님의 수난
14:65 어떤 사람은 침을 뱉으며...주먹으로 치며...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15:15 빌라도가...채찍질하고
15:17 군인들이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5:19 갈대로 그 머리를치며, 침을 뱉으며
15:20 희롱을 다한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끌고 나가니라
15:22 예수를 끌고
15:24 십자가에 못 박음
15:3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15: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15:34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크게 소리를 지르심
15:15 빌라도가...채찍질하고
15:17 군인들이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5:19 갈대로 그 머리를치며, 침을 뱉으며
15:20 희롱을 다한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끌고 나가니라
15:22 예수를 끌고
15:24 십자가에 못 박음
15:3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15: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15:34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크게 소리를 지르심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16:16-24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 이후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후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때 충성되고 의리의 제자 베드로가 그리 말아달라며 그 일이 결코 예수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를 함.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심하실 정도로 말씀을 하시기를 사단아 내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 하시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 하심.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어쩌면 고난의 받는 일이요, 죽음을 각오한 일이라는 것, 자신을 내 놓고 주님을 위해 손해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일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서는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사람의 일은 반대로 자신의 안위, 평안을 위한 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던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자신에게 당장 편하고 좋은 일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일 같으면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겠는가? 편히 왕 노릇하시고 떠 받음을 받으시면 되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의 일 즉 거룩한 사명 인간들을 구원하려는 귀한 일을 위해 자신의 관심, 이익, 중심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바로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들의 십자가를 져야함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처럼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사람의 일을 하려면 무슨 십자가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과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일을 내세우고 우선시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일인 것이다.
편한길로, 넓은 길로, 안전한 길로, 이익되는 길로만 가게끔 유혹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일을 하는 가를 먼저 묻고 그일을 시작해야만 한다.
사람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님 저 또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하려던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주시고 지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 이후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후 삼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때 충성되고 의리의 제자 베드로가 그리 말아달라며 그 일이 결코 예수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를 함.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심하실 정도로 말씀을 하시기를 사단아 내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 하시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 하심.
그럼,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고 사람의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은 어쩌면 고난의 받는 일이요, 죽음을 각오한 일이라는 것, 자신을 내 놓고 주님을 위해 손해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일수 있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위해서는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 곧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사람의 일은 반대로 자신의 안위, 평안을 위한 일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던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자신에게 당장 편하고 좋은 일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일 같으면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겠는가? 편히 왕 노릇하시고 떠 받음을 받으시면 되는 것을, 그러나 하나님의 일 즉 거룩한 사명 인간들을 구원하려는 귀한 일을 위해 자신의 관심, 이익, 중심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바로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들의 십자가를 져야함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처럼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사람의 일을 하려면 무슨 십자가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과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일을 내세우고 우선시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일인 것이다.
편한길로, 넓은 길로, 안전한 길로, 이익되는 길로만 가게끔 유혹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일을 하는 가를 먼저 묻고 그일을 시작해야만 한다.
사람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주님 저 또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하려던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주시고 지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2010년 6월 3일 목요일
마태복음 2장 -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
2장에서는 우리가 잘아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날을 기념하여 Dia de reyes 공휴일로 지킨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려 예수님 탄생후 이들과 같은 선물과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없어 많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동방박사들때문에 비극이 생기고 만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고 예수님 가족이 야밤도주를 해야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본문1절과 2절에 보면 예수님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왕에게 가서 유대인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묻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헤롯왕에게 가서 예수님이 어디서 나셨는지를 물음으로 해서 두 가지의 비극이 일어난다.
첫째는, 16절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네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두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에게만 가서 묻지만 않했어도 그 많은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직 왕에게 가서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유대왕이 났는데 어디있냐고 묻는 것은 무엇인지? 박사들이란 사람들이 그정도의 생각도 없었는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두째는, 13절,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안그래도 마구간에서 힘들게 태어나신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가 물은 것 때문에 밤에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 드린 황금, 유황과 몰야기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야밤 도주하는 처지에...
가만히만 있으면 예수님의 별이 알아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인도를 할텐데 9절에 보면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또 2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처음부터 예수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까지 인도를 했는데 왜 헤롯왕을 찾아가 그 비극을 유발시켰는지 이해가 않가지 않는가?
헤롯왕에게 얻은 정보는 기껏해야 베들레헴이라는 것 밖에, 베들레헴을 몰랐어도 결국에는 별이 알아서 찾아 주었을텐데....
그들의 잘못은 별을 보고 왔던 그들이 별이 없어지자 별을 보내신 하나님을 찾지않고 헤롯왕을 찾은 것이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이 상황이 바뀌고 어렵게되자 그 상황을 주장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권자를 찾고 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 죄인 인 것이다.
"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은나 사람의 일은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29:26
그 어처구니 없는 동방박사들의 실수 아니 믿음없는 행동이 큰 재앙을 낳게했다.
깊이 묵상을 하다가 그 동방 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별을 보고 먼 동방에서 부터 온 박사들이 갑작기 예루살렘에 들어서자 별이 잠시 없어졌던지 아니면 머춰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별이 이동을 하기를 기다리마 전혀 미동도 없자 생각하기를 자신들에게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남이 경배할 만큼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 먼 동방에서 온 것 같이 이방인인 헤롯왕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고 헤롯왕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 많은 아이들이 죽지도,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나 하나님은 이런 희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 있으셨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로 원하셨던, 뜻하셨던 일이 있으셨다.
첫째는,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리는이방인 분봉왕인 헤롯에게 온전하시고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3절) 그리고, 대제세장들과 서기관(4절)들에게,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기다리던 주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1장11절 말씀과 같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았고 이미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내 아이의 죽음을 17절,18절에 이에 예레미야의 말씀하신바(렘31장15절)....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애굽으로 도망가는 예수님의 가족은 15절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동방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 별을 멈추시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던 헤롯왕이 그리 하실 것 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12절,13절에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전한 뜻을 모르는 인간들의 죄와 잘못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것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도 그러나 결국 그 것을 피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또 우리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과의 벌어지는 모든 사건속에서 주님의 뜻에 우리의 행동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 하나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케 하시고 주님의 뜻에 집중하여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려 예수님 탄생후 이들과 같은 선물과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없어 많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동방박사들때문에 비극이 생기고 만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고 예수님 가족이 야밤도주를 해야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본문1절과 2절에 보면 예수님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왕에게 가서 유대인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묻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헤롯왕에게 가서 예수님이 어디서 나셨는지를 물음으로 해서 두 가지의 비극이 일어난다.
첫째는, 16절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네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두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에게만 가서 묻지만 않했어도 그 많은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직 왕에게 가서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유대왕이 났는데 어디있냐고 묻는 것은 무엇인지? 박사들이란 사람들이 그정도의 생각도 없었는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두째는, 13절,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안그래도 마구간에서 힘들게 태어나신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가 물은 것 때문에 밤에 도망을 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예수님께 드린 황금, 유황과 몰야기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야밤 도주하는 처지에...
가만히만 있으면 예수님의 별이 알아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인도를 할텐데 9절에 보면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또 2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처음부터 예수의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탄생한 마구간까지 인도를 했는데 왜 헤롯왕을 찾아가 그 비극을 유발시켰는지 이해가 않가지 않는가?
헤롯왕에게 얻은 정보는 기껏해야 베들레헴이라는 것 밖에, 베들레헴을 몰랐어도 결국에는 별이 알아서 찾아 주었을텐데....
그들의 잘못은 별을 보고 왔던 그들이 별이 없어지자 별을 보내신 하나님을 찾지않고 헤롯왕을 찾은 것이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것이 상황이 바뀌고 어렵게되자 그 상황을 주장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주권자를 찾고 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 죄인 인 것이다.
"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은나 사람의 일은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29:26
그 어처구니 없는 동방박사들의 실수 아니 믿음없는 행동이 큰 재앙을 낳게했다.
깊이 묵상을 하다가 그 동방 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별을 보고 먼 동방에서 부터 온 박사들이 갑작기 예루살렘에 들어서자 별이 잠시 없어졌던지 아니면 머춰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별이 이동을 하기를 기다리마 전혀 미동도 없자 생각하기를 자신들에게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남이 경배할 만큼 기쁘고 반가운 일이라 먼 동방에서 온 것 같이 이방인인 헤롯왕도 같을 것이라 생각했고 헤롯왕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 많은 아이들이 죽지도,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으로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나 하나님은 이런 희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 있으셨다.
동방박사들이 저지른 일로 원하셨던, 뜻하셨던 일이 있으셨다.
첫째는, 이스라엘백성을 다스리는이방인 분봉왕인 헤롯에게 온전하시고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3절) 그리고, 대제세장들과 서기관(4절)들에게,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기다리던 주님의 탄생을 알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1장11절 말씀과 같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았고 이미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내 아이의 죽음을 17절,18절에 이에 예레미야의 말씀하신바(렘31장15절)....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애굽으로 도망가는 예수님의 가족은 15절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동방박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 별을 멈추시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몰랐던 헤롯왕이 그리 하실 것 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12절,13절에 요셉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피하라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전한 뜻을 모르는 인간들의 죄와 잘못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알고자 하시는 것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도 그러나 결국 그 것을 피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또 우리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과의 벌어지는 모든 사건속에서 주님의 뜻에 우리의 행동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하나 하나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케 하시고 주님의 뜻에 집중하여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마태복음 1장 - 거꾸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족보, 나의 족보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며 시작한 후 2절부터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낳고...낳고다.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낳고...낳고....낳고해서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아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 것 같이 생각되어지는데,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는 오히려 반대 아니 거꾸로라고 깨닫게 되었다.
아브라함, 이삭...유다...다윗...요셉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기 위해 거꾸로 요셉과 다윗과 유다, 이삭, 아브라함을 사용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내 족보를 보면 이항복시조의 15대손 경주이씨로써 이재훈이 태어난 게 아니라, 나 이재훈을 하나님께서 이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하신 것이고, 나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내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용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것이 억지같이 들릴질 모르나,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나를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디자인하셔서 1969년 6월5일에 태어나게 하시고 오늘 2010년6월5일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게 집중이 되어있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버지의 대에서도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내 아버지를 탄생케하시여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준비하시고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족보나 내족보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요한가? 아니면 아브라함이 중요한가? 누가 주인공인가?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공이기에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의 사랑과 나를 향한 계획이 여기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족보에는 각각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당연히 예수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이자 삶의 목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에 그의 삶이 드러나듯이, 다윗의 이름에 그의 삶의 목적이 나타나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21절에 보면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그의 삶의 목적과 그의 삶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해야할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대로 사셨고 그 삶의 목적대로 사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름대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대로 삶의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재훈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삶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제 이름의 족보를 주시고 제게 관심을 가지시고 제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제 이름에 합당한 삶을 주님의 뜻에 맡게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낳고...낳고....낳고해서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아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 것 같이 생각되어지는데, 묵상을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는 오히려 반대 아니 거꾸로라고 깨닫게 되었다.
아브라함, 이삭...유다...다윗...요셉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기 위해 거꾸로 요셉과 다윗과 유다, 이삭, 아브라함을 사용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내 족보를 보면 이항복시조의 15대손 경주이씨로써 이재훈이 태어난 게 아니라, 나 이재훈을 하나님께서 이시대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게 하신 것이고, 나를 이땅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내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용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이것이 억지같이 들릴질 모르나,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나를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나의 삶을 디자인하셔서 1969년 6월5일에 태어나게 하시고 오늘 2010년6월5일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게 집중이 되어있는 것이다.
당연히 내 아버지의 대에서도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내 아버지를 탄생케하시여 내 할아버지 할머니를 준비하시고 선택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족보나 내족보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요한가? 아니면 아브라함이 중요한가? 누가 주인공인가? 당연히 예수님이 주인공이기에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거꾸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의 사랑과 나를 향한 계획이 여기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족보에는 각각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당연히 예수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이자 삶의 목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에 그의 삶이 드러나듯이, 다윗의 이름에 그의 삶의 목적이 나타나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21절에 보면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 그의 삶의 목적과 그의 삶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해야할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대로 사셨고 그 삶의 목적대로 사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름대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대로 삶의 목적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재훈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삶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제 이름의 족보를 주시고 제게 관심을 가지시고 제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제 이름에 합당한 삶을 주님의 뜻에 맡게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요한복음21장-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와라
ㅅ21장을 읽다가, 이미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준비해 두신 예수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이유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깨달음을 달라 기도하며 묵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깊은 깨달음을 주셨다.
21장은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려 나타나셨다.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간다며 디베라 바다로 갈때 여러 제자들이 따라갔다. 밤새 고기를 못잡고 새벽이 되었을때 주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고 말씀대로 하였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신줄 알고 바다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쳐 육지로 나온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미리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으로 조반을 준비해 두셨다. 그런데 이미 어디선가 준비해 두신 생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셨다.
왜 방금 잡은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을까? 준비한 생선이 모자라서? 예수님이 사람 수 계산을 잘 못 하셨으므로? ...아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하시며 베드로에게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당부를 하시기 위해서다.
주목해서 봐야할 단어는 먹으라, 먹은후, 먹이라는 동사 먹다이다. 21장에 4번이 나오는데 모두 전단락을 연결하며 마지막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앞절에 사용된 단어이다.
첫번째, 먹다는 1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미리 준비해 두신 조반을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다. 이미 생선은 준비해 두셨기때문에 구지 지금 잡은 생선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한마리씩 세어보고 총 153마리인 것을 확인후 몇 마리를 가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영문도 모른채 조반을 먹었을 것이다.
두번째, 먹다는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조반을 준비해 두셨을까?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드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구운 생선을 먹여 주시기 위해?
분명히 깊은 뜻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그의 앞으로의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예수님의 당부를 하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가 필요하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육의 효과와 이해력을 돕기위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 내용과 관계되는 일로써 조반을 준비하신 것이다.
세번째, 먹다는 15절, 17절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하신 후 그리고, 조반 먹은 후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맡기고 갈 양들을 양육하고, 지키고,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기억에 남게 그의 삶에 강하게 새길까 생각하시며, 예수님께서 직접 생선을 잡아 구워주시며 제자들을 먹이우신 것 같이 예수님을 통해 얻은 그 많은 고기를 가지고 맡기신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 본인들의 일상으로 돌아와 고기를 잡겠다는 그들에게 그 고기를 준비해 두시고 먹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영혼, 양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얻은 수 많은 고기를 가지고 그 양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워주고 먹이라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비유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나 우리는 그분의 양을 먹여야 한다. 무엇으로 먹여야 하나? 예수님을 통해 얻은 것으로 예수님이 먹이게 하신 방법으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고기가 아닌, 우리가 밤새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수고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얻은 고기로 우리는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미리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으로 양들을 있는 곳에서, 양들의 일터에서, 양들의 일상에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이제껏 제게 맡겨주신 양들을 제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먹이려 했던 제 중심적이었던 모습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을 통해 얻어지는 주님의 것으로 먹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서서, 주님 중심의 삶, 주님 닮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21장은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려 나타나셨다.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간다며 디베라 바다로 갈때 여러 제자들이 따라갔다. 밤새 고기를 못잡고 새벽이 되었을때 주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시고 말씀대로 하였더니 많은 고기를 잡게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신줄 알고 바다속으로 뛰어 들어가 헤엄쳐 육지로 나온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미리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으로 조반을 준비해 두셨다. 그런데 이미 어디선가 준비해 두신 생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하셨다.
왜 방금 잡은생선을 가져오라 하셨을까? 준비한 생선이 모자라서? 예수님이 사람 수 계산을 잘 못 하셨으므로? ...아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하시며 베드로에게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당부를 하시기 위해서다.
주목해서 봐야할 단어는 먹으라, 먹은후, 먹이라는 동사 먹다이다. 21장에 4번이 나오는데 모두 전단락을 연결하며 마지막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앞절에 사용된 단어이다.
첫번째, 먹다는 1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미리 준비해 두신 조반을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다. 이미 생선은 준비해 두셨기때문에 구지 지금 잡은 생선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한마리씩 세어보고 총 153마리인 것을 확인후 몇 마리를 가져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영문도 모른채 조반을 먹었을 것이다.
두번째, 먹다는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조반을 준비해 두셨을까?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드시기 위해? 예수님이 직접 구운 생선을 먹여 주시기 위해?
분명히 깊은 뜻이 있었다. 베드로에게 그의 앞으로의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과 예수님의 당부를 하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가 필요하셨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육의 효과와 이해력을 돕기위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 내용과 관계되는 일로써 조반을 준비하신 것이다.
세번째, 먹다는 15절, 17절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하신 후 그리고, 조반 먹은 후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맡기고 갈 양들을 양육하고, 지키고, 가르쳐야 하는데 어떻게 기억에 남게 그의 삶에 강하게 새길까 생각하시며, 예수님께서 직접 생선을 잡아 구워주시며 제자들을 먹이우신 것 같이 예수님을 통해 얻은 그 많은 고기를 가지고 맡기신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 본인들의 일상으로 돌아와 고기를 잡겠다는 그들에게 그 고기를 준비해 두시고 먹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맡기신 영혼, 양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얻은 수 많은 고기를 가지고 그 양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워주고 먹이라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비유이지만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나 우리는 그분의 양을 먹여야 한다. 무엇으로 먹여야 하나? 예수님을 통해 얻은 것으로 예수님이 먹이게 하신 방법으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고기가 아닌, 우리가 밤새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수고 없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얻은 고기로 우리는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미리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으로 양들을 있는 곳에서, 양들의 일터에서, 양들의 일상에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이제껏 제게 맡겨주신 양들을 제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먹이려 했던 제 중심적이었던 모습을 용서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을 통해 얻어지는 주님의 것으로 먹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서서, 주님 중심의 삶, 주님 닮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2010년 5월 16일 일요일
2010년 4월 19일 월요일
성경공부 4월25일
- Leer el cap. 16
- Por qué Dios hizo recoger el maná diariamente?
- Cuál fue la manera de dar el maná y codornices al pueblo Israel? Dios es muy detallista?
- Comparar el maná y el pan de vida
- Por qué Dios hizo recoger el maná diariamente?
- Cuál fue la manera de dar el maná y codornices al pueblo Israel? Dios es muy detallista?
- Comparar el maná y el pan de vida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성경공부 4월18일
Tarea :
- Leer el cap. 15
- Averiguar :
* quién es el fundador de la universidad de Chicago (미국 시카고대학 설립자가 누군지?)
* Investigar sobre el pesonaje (fundador) (설립자에 대해서 알아오기)
- Por qué Dios antes de darnos el agua dulce primero nos da el agua amargo? (하나님은 단물을 주시기전에 먼저 쓴물을 주시는가?)
- Leer el cap. 15
- Averiguar :
* quién es el fundador de la universidad de Chicago (미국 시카고대학 설립자가 누군지?)
* Investigar sobre el pesonaje (fundador) (설립자에 대해서 알아오기)
- Por qué Dios antes de darnos el agua dulce primero nos da el agua amargo? (하나님은 단물을 주시기전에 먼저 쓴물을 주시는가?)
2010년 4월 5일 월요일
성경공부 04/11
Tarea :
- Leer el cap. 14
-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 언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앞과 뒤가 꽉 막혀있었던 적이 있는지?
- 진퇴양란(앞뒤가 꽉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 Leer el cap. 14
-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 언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앞과 뒤가 꽉 막혀있었던 적이 있는지?
- 진퇴양란(앞뒤가 꽉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2010년 4월 4일 일요일
주님의 십자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부활절이라 청년들이랑 여지껏 항상 주님의 십자가만을 얘기하고 생각하는데, 우리 각자가 져야할 십자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 같아, 눅9:23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을 묵상한 것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며 :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져야만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란 전제로 1)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그랬듯이 십자가에 달리실 그 시간 만큼은 자신을 부인하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
- 이재훈이는 더이상 없다 내 삶에 오직 주님뿐이다,
- 이재훈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주님에 의해, 주님을 위해 존재 한다,
- 이재훈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주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 라는 믿음이다.
2)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날마다" 중요하지, 그냥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시지 않고 날마다라는 형용사를 붙이셨을까?
날마다는 :
- 유효기간이 단 하루이기때문에,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반복되어져야 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날다마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
- 습관이 되야 하기에, (반복학습은 습관을 만든다),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기에.
그럼 각자가 지어야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 좋던 싫던 내가 지어야할 십자가./ 이잔을 지나가게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내가 태어나고, 살아야 할 목적을 주는 십자가./예수님의 태어나신 목적,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게 한 십자가처럼
- 하나님이 내 삶에 주신 뜻을 이루기위한 필수적인 고통의 십자가./ 인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주님의 외침처럼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을 되새기며,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알때에 비로서 영혼 깊은곳에서 흘러 나오는 진정한 평안과 내려놓음을 통한 주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각자가 어렵고 힘들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때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 십자가를 지기를 기도하며,
그리할때 좋으신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는 말씀으로, 결국 우리의 십자가 마저 주님이 대신 져주시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Estudio Biblico 2010/04/04
- Leer el cap. 13
- Ver la película : El libro de los secretos (The book of Eli) y 하나님은 Eli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오기
- 왜 하나님은 가까운 길을 나두고 먼 광야길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인도하시는지 생각해오기
- Ver la película : El libro de los secretos (The book of Eli) y 하나님은 Eli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오기
- 왜 하나님은 가까운 길을 나두고 먼 광야길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인도하시는지 생각해오기
2010년 3월 22일 월요일
Estudio Biblico 2010/03/28
Para el domingo :
- Leer el cap. 12
- 2절, 애굽에서 나오는 날을 이스라엘의 달의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했을까?
- 어린양이 의미하는 것은?
- Leer el cap. 12
- 2절, 애굽에서 나오는 날을 이스라엘의 달의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했을까?
- 어린양이 의미하는 것은?
2010년 3월 21일 일요일
다니엘서 3장 16-18절 묵상
아무도 글을 올리지 않았네? 성경공부가 없었어도 말씀 묵상은 했겠지?
우리가 다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가운데 던지움을 당할때 고백했던 말씀 18절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어떤 믿음으로 아니 어떤 마음으로 그런 담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고 부러우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왕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저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물을때:
16절에"......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겁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절하지 않겠나이다" 이전에 이런 대답을 한 믿음이 바로 이 담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겠끔 했다.
지금까지 포로생활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은망덕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대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신앙, 하나님의 이제까지 지켜주신 은혜에 신상에절을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 하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대답할 가치 조차도 없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믿음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맡기는 것이다. 둘째 믿음은 과거를 지켜주신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를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셋때 믿음은 과거를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해 현재가 주어지지 않아도, 미래가 주어지지 않아도 감사하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여러분의 과거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 믿습니까? 그럼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맡기십시요. 아니 현재와 미래를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가운데 던지움을 당할때 고백했던 말씀 18절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어떤 믿음으로 아니 어떤 마음으로 그런 담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고 부러우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왕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저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물을때:
16절에"......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겁니다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절하지 않겠나이다" 이전에 이런 대답을 한 믿음이 바로 이 담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겠끔 했다.
지금까지 포로생활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은망덕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이대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신앙, 하나님의 이제까지 지켜주신 은혜에 신상에절을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 하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대답할 가치 조차도 없다는 믿음인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믿음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맡기는 것이다. 둘째 믿음은 과거를 지켜주신 하나님이 현재와 미래를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셋때 믿음은 과거를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해 현재가 주어지지 않아도, 미래가 주어지지 않아도 감사하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여러분의 과거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 믿습니까? 그럼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맡기십시요. 아니 현재와 미래를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10년 3월 8일 월요일
Estudio Biblico 2010/03/14
Para el domingo :
- Leer el capitulo 11.
- 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다(sufrimiento, prueba es un camouflage de la bendicion de Dios)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 하나님의 축복을 금송아지와 바꾼적인 있는지?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다. 왜그런지?
- Leer el capitulo 11.
- 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다(sufrimiento, prueba es un camouflage de la bendicion de Dios)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 하나님의 축복을 금송아지와 바꾼적인 있는지?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다. 왜그런지?
2010년 3월 1일 월요일
Para el domingo 07/03
- Leer el Cap. 10
- Buscar los versículos, donde Faraón intenta transar con Dios a través de Moisés.
- Hemos transado(타협) nuestra fe con Dios?
- 예수님께 타협의 시험을 한 마귀에게 어떻게 대항하셨는지?
- Buscar los versículos, donde Faraón intenta transar con Dios a través de Moisés.
- Hemos transado(타협) nuestra fe con Dios?
- 예수님께 타협의 시험을 한 마귀에게 어떻게 대항하셨는지?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Lo que me hizo el Señor a la vuelta antes de subir al avion
일상에서의 크리스찬임을 나타내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주님,
페루에서 일을 마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오는 길에 Check In을 하고 Tasa Aeroportuaria를 내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 차례가 되어 돈을 내려하는데 돈을 받는 직원이 내게 하는말, " 저기 한 여자가 돈이 부족해서 Tasa를 못내고 있으니 도와 줄 수 있느냐? " 그래서 거기로 가보니, 동양인으로 젊은 자매가(나중에 물어보니 홍콩여자로 시드니에 가는 중이라 함) 서 있었다. 스페인어는 하나도 못하고 영어만... 영어 공부를 좀 해 둘걸... 않되는 영어로 물어보니 6불이 모자른다고, 그래서 6불을 주고 같이 세관통관을 위해 기다리는데, 내짐은 Scaner를 지나 잘 나왔는데, 이 홍콩 자매의 가방을 stop시키더니 화장품을 꺼내며 세관직원이 비닐백에 넣어가야지 안그러면 버리고 가야 된다고... 이 자매가 스페인어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일 없고 다시 통역을 해 주며 비닐 백이 필요하다고 하니 세관직원이 파는 곳을 가리키며 사오라고 했다. 돈이 없는 이 자매는 어쩔쭐 몰라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돈을 주어 사주고 혹 또 돈일 필요할지 모르니 받으라고 돈을 더 주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그 돈을 받으며 Thanks you를 계속 반복했다. 그때 내 마음을 울리는 말, 입 밖으로 얘기를 했다. " I am a Christian, i do it for Jesus "내 영어가 맞았는지는 몰랐지만 어째든... 그 자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Thanks Jesus"를 그 자매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Thanks... Jesus....Thanks를.....
영어가 짧아 복음 증거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오늘 일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라 믿고, 예수님을 알아가기를 기도하고 바랄뿐이다.
리마에서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이재훈집사
페루에서 일을 마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오는 길에 Check In을 하고 Tasa Aeroportuaria를 내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 차례가 되어 돈을 내려하는데 돈을 받는 직원이 내게 하는말, " 저기 한 여자가 돈이 부족해서 Tasa를 못내고 있으니 도와 줄 수 있느냐? " 그래서 거기로 가보니, 동양인으로 젊은 자매가(나중에 물어보니 홍콩여자로 시드니에 가는 중이라 함) 서 있었다. 스페인어는 하나도 못하고 영어만... 영어 공부를 좀 해 둘걸... 않되는 영어로 물어보니 6불이 모자른다고, 그래서 6불을 주고 같이 세관통관을 위해 기다리는데, 내짐은 Scaner를 지나 잘 나왔는데, 이 홍콩 자매의 가방을 stop시키더니 화장품을 꺼내며 세관직원이 비닐백에 넣어가야지 안그러면 버리고 가야 된다고... 이 자매가 스페인어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일 없고 다시 통역을 해 주며 비닐 백이 필요하다고 하니 세관직원이 파는 곳을 가리키며 사오라고 했다. 돈이 없는 이 자매는 어쩔쭐 몰라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돈을 주어 사주고 혹 또 돈일 필요할지 모르니 받으라고 돈을 더 주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더니 그 돈을 받으며 Thanks you를 계속 반복했다. 그때 내 마음을 울리는 말, 입 밖으로 얘기를 했다. " I am a Christian, i do it for Jesus "내 영어가 맞았는지는 몰랐지만 어째든... 그 자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Thanks Jesus"를 그 자매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Thanks... Jesus....Thanks를.....
영어가 짧아 복음 증거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오늘 일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생각할 것이라 믿고, 예수님을 알아가기를 기도하고 바랄뿐이다.
리마에서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이재훈집사
Quiero Compartir (Lo que hiza nuestro Señor en el avión)
Quiero compartir lo que hizo nuestro Señor en el avión.
페루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신 일에 대해 나누고 싶네요
내옆에 앉아 계속 기침을 하는 페루 할머니 azafata에게 부탁을 해서 물도 갖다드리고 했는데도,
페루 할머니(73세)가 계속 기침을 하며(era molesto) 앉아 있었고 나는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마음에 전도를 해야된다는 마음이 생겼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비행기 안에서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해? 그리고 기침을 너무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하며 마음에서 오는 소리를 무시했다.
그러나 계속 전도 해야한다는 마음이 들어 속으로 주님께서 할머니를 전도받도록 준비하셨으면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 오도록 해주세요 그러면 전도 하겠다고 기도를 했다.
그때 비행기가 흔들리며 (turbulencia) 안전밸트를 착용하라는 anuncio 가 나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듯이 할머니가 안전밸트를 매는데 도와달라고 말을 걸어와서, 아! 전도를 해야되는구나!, 나는 바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아느냐고 시작해서(당연히 잘 모르고 있었다) 사영리를 전하고 같이 영접기도를 따라하게끔하고 할머니안에 예수님이계심을 전했다.
그리고 나에게 하는말이 pulmón에 문제가 있어 계속 기침을 하는데 약도 없고 의사도 고칠 수없다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다시 기도를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주님께 기도를 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쉬시라하고 다시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할머니로 하여금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세요 라고..
그리고, 비행기는 리마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도와 짐을 찾아드리고(4 valijas). 딸이 마중나왔다며 딸있는데까지 같이 가달라고 부탁을해 그렇게 했다. Dios le bendiga 인사를 하고 내 길을 가려는데 문득 전도를 하고 기도를 하고 난 이후 해에질때까지 3시간이 지나도록 기침을 하지않았다. 주님이 낫게 해주신건가? 나는 잘 모르지만 할머니께 살아계신 주님을 보여달라고 기도한 것이 응답이되었을 수도... 주님 감사합니다
할머니 se llama :
Sra. Gregoria Ramirez
Vive en Tarapoto - uñombuqui a 1000km de Lima.
이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할머니와 그의 가정(남편과 8남매) 그리고 그동네 주민들에게도 예수님이 전해질 수 있도록...
언제 이 할머니 계신데에 가보고 싶네요. 그 동네에 가서 전도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구.
주님의 사랑과 살아계심을 전하며,
Paita에서 이재훈집사
22/02/2010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Lo que compartimos 21/02
Lo que compartimos en el domingo pasado era sobre el libro de 이용규 박사의 "내려놓음" algun voluntario puede resumir y dejar lo que le llego a su corazon.
Para el 28/02 domingo ver el anterior
Con el amor de Cristo
Para el 28/02 domingo ver el anterior
Con el amor de Cristo
2010년 2월 16일 화요일
Estudio biblico 21-02
- Leer el capitulo 9 (Exodo)
-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와 애굽백성을 보게되는 구절을 찾기.
- 언제, 어떨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같아질 수 있는지?
-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와 애굽백성을 보게되는 구절을 찾기.
- 언제, 어떨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같아질 수 있는지?
2010년 2월 15일 월요일
Exodo cap. 8
Jung Eun!
Compartamos entre todos sobre el estudio biblico del domingo pasado.(exodo cap.8)
Compartamos entre todos sobre el estudio biblico del domingo pasado.(exodo cap.8)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2010/01/31 Estudio biblico
성경공부준비:
- 출애굽기 7장 읽어오기
- 7장의 주제 파악하기
- 세계 4대 문명지(las cuatro(4) primeras civilizaciones del mundo)와 그 이유 조사하기
-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Nos vemos el domingo
- 출애굽기 7장 읽어오기
- 7장의 주제 파악하기
- 세계 4대 문명지(las cuatro(4) primeras civilizaciones del mundo)와 그 이유 조사하기
-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Nos vemos el domingo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2010/01/24 estudio biblico
이번주 주일 성경공부 준비 :
- 출애굽기 6장 읽어오기
-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 찾기
- 인디아나 존스 3편(y la ultima cruzada) 내용 기억해 오기
- 출애굽기 6장 읽어오기
-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 찾기
- 인디아나 존스 3편(y la ultima cruzada) 내용 기억해 오기
2010년 1월 17일 일요일
상혁이가 한국갑니다.
1년간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상혁이가 한국을 갑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경험하고 얻은 귀한 신앙의 발전과 선교의 비젼을 간직하여
한국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상혁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경험하고 얻은 귀한 신앙의 발전과 선교의 비젼을 간직하여
한국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상혁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0년 1월 16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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